‘Guilt is perhaps the most painful companion of death.(죄책감은 아마도 죽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동반자일 것이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 직전, 방송사 여행 다큐 제작 피디(PD)인 민주는 서울 강남구 서초동 삼풍백화점에 있었다. 신혼가구를 알아보기 위해 지하 커피숍에서 약혼자 현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신혼여행 계획을 정성들여 짜 놓은 다이어리를 현우에게 선물하려고 막 포장을 마친 순간 ‘우지끈~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주변 모두가 화들짝 놀라고 몇 초 후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천정이 내려앉고 바닥이 쪼개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막 퇴근한 초임 검사 현우는 약혼녀 민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현우 직장인 검찰청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그녀를 억지로 등 떠밀어 인근 삼풍백화점 커피숍에 가서 기다리게 했었다. 백화점 앞 길 건너에서 신호 대기 받던 중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민주가 있을 그 백화점 건물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꿈속에 서있는 느낌. 이후 그의 삶의 모든 건 바뀌었다. 유지태-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는 삼풍백화점 사고로 연
제주민속학자인 고광민이 편저한 ‘제주 상창리 梁氏家 고문서(2018)’에 의하면, 1801년에 쓰인 고문서에 월라봉 동쪽에 있는 큰밭 지경이란 의미의 月羅岳東大田員(월라악동대전원)이란 한자가 등장한다. 또한, 위 고문서에는 월라봉에서의 농사와 관련된 글이 10여 차례 소개된다. 사진에서 보듯 여러 고문서 말미에 서명으로 손바닥 인장을 찍기도 했다. 월라봉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오색토라는 흙이 채취되었다는 점이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오색토를 채취하여 집 벽체나 바닥의 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감산향토지(2002)에는 ‘월라봉 동북쪽 300미터 지경에 위치한 월라봉 진입로 일대에는 넓은 밭이 있고 8가구가 살고 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곳이 앞에서 소개한 고문서에 기록된 月羅岳或洞員이다. 제주의 여러 마을에도 있었던 혹동원(或洞員)은 월라봉에 있던 통밧을 일컫는 말이다. 감산향토지에 실린 혹통밧에 대한 기록이다. ‘오색토를 채굴하던 굴 입구는 기어야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오색토층이 형성되어 보기에 휘황찬란하며 신비한 느낌을 준다. 과거 여유 있는 집에서는 양회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흙에는 광석 성분
백로는 24절기의 하나, 15번째로 처서와 추분 사이다.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다. 가을 초입으로 추색이 완연하다 하나 아직 낙엽은 없다. 무더위를 몰아내는 계절의 첨병이라 나처럼 여름내 헉헉대 온 사람에겐 선선하니 자애롭다. 갈바람을 데리고 온다 꾸짖으랴. 나무들도 단풍 준비에 부산할 것이라. 어느새 벌겋게 불타는 가을 산을 기다려 가슴 설렌다. 양력 9월 7,8일경이니 계절의 완충지대, 아직 덧옷을 꺼내기엔 철 이른데,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스치는 바람 끝날의 냉기가 별안간 낯설다. 하지만 입던 입성대로 지낸다고 고뿔 걸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조금 만만한 절기다. 놓쳐선 안될 게 바로 이것이다. 이 틈새를 비비고 들어가 마주하고 선다면 팍팍한 일상에 낭만을 불러들일 여유 공간이 다가올 것이다. 다만 홀연히 추위가 닥쳐올지 모른다고 걱정을 가불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백로(白露)엔 ‘흰 이슬’, 들판에 덮인 이슬빛이 순일하다. 많이 내린 날에 앞마당에도 나가 서게 그 빛깔이 희디희니 처연하다. 은연중 눈이 달려가 풀잎 끝에 맺힌 이슬에 가 있다. 가을빛이 방울방울 윤슬로 영롱하다. 장마가 걷힌 뒤라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다. 속담에 나온다.
“하나님, 계세요? 드디어 만났군요. 지금까지 한번도 이렇게 기도 드린 적이 없어서 죄송해요. 그동안 당신이 주신 축복에 감사드려요. 근데 너무 힘들어요. 남편과 완전히 딴 배를 탄 느낌이에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우리기 쇼윈도우 부부인 줄 모를 거예요. 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말씀만 해주시면 뭐든 다 따를게요.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 싫고 용서가 안 돼요.” 서른 한 살의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뉴욕의 성공한 작가다. 1년 전에는 맨해튼에 멋진 집까지 장만했다. 사람들은 통상 그녀를 리즈라 부른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고, 뭐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철저하게 몰입하고 집착이 강하다. 주변 모든 이들은 리즈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본인은 힘들다. 이런 완벽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힘든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속으론 늘 스트레스에 절어 산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남편 스티븐 때문이다. 스물세 살에 좋아서 결혼했으니 이제 8년째 함께 살아왔지만 남편은 지금껏 한 번도
▲월라악의 왕자묘와 이두어시봉 지난 호에 소개한 증보 탐라지(增補 耽羅誌)의 한 대목이다. ‘군산의 서쪽에 월라악이 있고 그 위에 왕자묘가 있다. 그 남쪽으로 이두어시봉이 있다(山之稍西月羅岳 上有王子墓 其南有泥頭於時峰…).’ 월라봉에는 오래전 설촌됐다가 4·3으로 사라진 ‘이두어시’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지경 중 높은 곳을 이두어시봉이라 부른다. 위 글에는 월라봉 이두어시 마을의 한자어로 최근에 쓰이는 ‘그 이(伊)’가 아닌 ‘진흙 이(泥)’를 쓰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두어시’라는 지명은 월라봉에서 채취한 오색토와 관련해 형성된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위 고서에는 월라봉 정상 한 편에 왕자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자골이라 불리는 상예1동(3546번지 일대)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지금은 사라진 왕자묘는 원나라 왕자 둘이 탐라에 귀양 와서 묻힌 무덤이라고도 하고, 산남지역을 다스리던 탐라왕자의 무덤이라고도 전한다. 특히 후자는 한라산 산북을 성주가 다스리고, 산남 서부지역을 왕자가 다스렸다는 데서 기인하는데, 월라봉 인근 마을인 화순리에는 양왕자터라는 지명도 있다. 탐라순력도(1702) 고원방고(羔園訪古)는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
▲양치삼梁致三: 1911~1937(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양달하(梁達河)의 장남으로 한림읍 대림리(선-돌)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3일 학생 운동이 발생했고, 그는 3월 9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1년 8월 29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양치종梁致鍾: 1920(일제강점기)~2015. 제주도 교육감. 제주시 화북리(별도)에서 변호사 양홍기(梁洪基)와 김한옥(金漢玉)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주-성안’ 남문로 입구 ‘한질-골’로 옮겨 제주유치원에 다녔고 제주북교를 거쳐 1939년 휘문(徽文)중학교를 졸업했다. 만주(滿洲) 간도성 소재의 화룔현 공립 광제(光霽)욕국민우급학교 교유(敎諭)로 피명(被命), 1941년 도쿄문리학교 고등사범학과에 입학해 1944년 태평양전쟁으로 중퇴하고 1945년 6월 경성(京城)제국대학 이공학부 연구수(硏究手)로 임명됐다. 같은 해 광주사범학교 교유로, 1947년 목포 정명(貞明)여자중학교로 전입, 1949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전국적으로 많은 가을 축제가 취소되거나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제주에서는 제주일노래 상설공연이 오는 9월 22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축제는 오른쪽 표와 같다. 참고로 전국에서 진행하는 모든 축제의 자세한 내용은 ‘팔도축제’ 카카오톡 채널과 카카오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일보
▲올레길 속에 녹아든 제주의 역사와 문화 해외 여행길이 막히거나 부담스러운 코로나19 시대에 제주는 대체 여행지로서 더 부각되는 모양새다. 필자는 지면을 할애해 제주올레 26개 코스에 스며있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50개 이야기와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보고자 한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제주에서 인생을 보내면서 제주역사와 문화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많다. 올레 6코스는 서귀포시 쇠소깍다리를 출발해 서귀포시내를 통과, 이중섭거리를 거쳐 허니문하우스 전망대에 이르기까지 푸른 바다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이중섭 화백(1916~1956)은 6·25전쟁으로 1·4후퇴 때 원산에서 탈출, 부산을 거쳐 1951년 서귀포시 정방동 4.6㎡(1.4평) 쪽방에 정착했다. 부인과 아들 2명을 데리고 서귀포로 피난을 온 후 11개월 동안 머물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화백의 편지는 천재 화가 이전에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유배인 추사 김정희야 많이 알려졌지만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로 왔는지는 모르는 이들도 많다. 제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올레 20코스 구좌읍 행원
▲말의 별인 천사방성(天駟房星)의 땅 탐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보유하고 다루는 능력이 곧 국력이던 시대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계 올림픽에서 인간이 동물과 함께 하는 유일한 경기가 승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과 관련된 별자리인 방성(房星)을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라 하여 제사를 지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성 동대문 밖에 설치된 마조단에서, 제주에서도 읍성 남문 밖 삼성혈 근처에 있는 KAL호텔 자리에 마조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방성은 하늘의 수레를 이끄는 네 필의 말이라 하여 천사(天駟)라 이르기도 하고, 방성과 천사를 합쳐 천사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의 수레를 끄는 네 필의 말을 상징하는 별인 천사방성이 비치는 제주는 예로부터 말들의 세상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조정에 바치는 말인 공마(貢馬)를 기르는 곳이라 하여 월라봉 일대를 공캐라 불렸다. 캐는 제주어로 들판 또는 목장지대를, 개는 포구를 의미한다. 안덕계곡과 남반내가 위치한 감산리에는 원의 탐라 통치 시 군마육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감산리에도 말과 관련한 지명들이 꽤 있는데, 공ᄆᆞᆯ캐를 비롯하여 말을 가두었던 밭에서 유래된 ᄆᆞᆯ왓, 말의 잔등과 닮은 밭
▲양중해梁重海:1927(일제강점기)~2010, 호는 현곡(玄谷),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장, 시인, 제주문화원장. 제주시 화북리(벨도) ‘거로-동네’에서 양선희(梁聖熙)와 어머니 나주김씨 우수(右修)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했고 부인 김진열(金鎭烈·조천)과 3남 1녀를 두었다. 중화민국 중화학술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사상계’ 시추천(詩推薦)으로 문단에 데뷔(1959년 7월)했다. 제주대학교 강사 및 교수(1961~1992)로 있었고 제주도문화상을 수상(1967)했다. 제주도문화재위원,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장(1982~1984),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장(1984~1986) 등을 지냈다. 제주농업중학교(6년제)를 졸업(1949)했고 세종(世宗)중학교원양성소(국어과)를 수료(1950)했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1957)해 일본 동경대학원 국어국문학 전문과정을 수료(1977~1979)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 에서 문학석사(1979~1981)를 학위를 받았다. ※양중해의 시 ‘弧線’=호선상에서/ 자라나는 거리를. 양 끝에 서서 들어다 보면/ 메아리 서글픈 상록수 숲 속 길,/ 두 점을 맺은 숨 찬 인력은/ 창공을 뻗는 칠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