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역사는 ‘서편제’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60년대 최고 흥행작 ‘미워도 다시한번’ 30만 이래 고만고만하던 극장 관객 수는 1993년 ‘서편제’ 개봉 때 무려 100만을 넘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이 동력이 발판 되어 몇 년 후 ‘쉬리’가 단박에 6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우리영화 르네상스를 열었고, 2003년 ‘실미도’에 이르러선 급기야 1,000만 관객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의 코로나 시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탄생도 실은, 거장 임권택 감독이 30년 전 ‘서편제’를 통해 다져 놓은 토양 덕분일 것이다. 단성사 개봉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까지 청와대에서 관람했다며 연일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에도 내게는 어쩐지 ‘서편제’가 관심권 밖이었다. 판소리나 우리 전통 문화를 철없이 얕잡아 보며 시건방을 떨던 시절이기도 했고, ‘국뽕’ 장단에 난리법석이구나 하는 괜한 의심도 한몫 했다. 몇 년 후 비디오를 빌려와 집에서 뒤늦게 보았을 때의 놀람과 감동이 지금도 선명하다. 혈연은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가족이 된 세 식구의 슬픈 이야기
▲3대 국당(國堂)의 하나인 차귀당 당오름으로도 불리는 당산봉 동남쪽 중턱에는 오래전 뱀신을 모시던 차귀당이 있었다. 차귀당은 탐라시대부터 제주시의 광양당과 안덕면의 광정당(덕수리 소재)과 함께 3대 국당이라고 전해진다. 광양당은 한라산 수호신을 모시는 당이었고, 차귀당과 광정당은 뱀신을 모시는 당이었다.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소각(消却)된 차귀당은 수년 후 복원되었다가 1882년(고종 19년)에 다시 훼철되었고, 1990년 지역 주민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1679년(숙종 5년) 순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이증이 제주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일기체로 적은 ‘남사일록’에는 ‘차귀당은 차귀악(당산봉)의 기슭에 있는데, 뱀신(蛇鬼)을 모신 무속사당이다. 지붕·벽·들보·초석에 무리진 뱀들이 얽혀 있으나, 제를 지낼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서롭다.’라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편찬된 ‘증보 탐라지’에도 ‘대정현 사직단이 현청 서쪽 3리에 있으며, 대정현의 성황사를 차귀당이라 하며, 민간에서 뱀신에게 제사 지낸다. 집의 벽과 들보며 초석에 뱀 무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제사를 지낼 때 나타나지 않아야 길한 조짐으로 여긴다.’라고 쓰여있다. 조정에서는
▲제주올레 16코스 시작점인 고내포구를 벗어나면 잠시 오르막 끝에 애월 해안도로변 시원한 언덕에 이른다. 서쪽 절벽 아래로 방금까지 지나온 해안선과 쪽빛 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다락쉼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여러 석상들과 정자와 벤치 등이 잘 배치된 공간이다. 다락쉼터 초입에 가지런히 놓인 벤치들 옆에는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란 문구가 적힌 대형 비석이 서 있다. 이곳 애월 지역이 ‘몽골에 맞서고 오랑캐를 없앤 땅’이란 뜻이겠고, 양쪽에 소박한 자태지만 호위무사인 듯 서 있는 두 명의 장군 석상이 이 비문을 뒷받침해준다. 비석 왼쪽은 ‘항파두리’ 안내석과 함께 김통정 장군의 석상이고, 오른쪽으론 ‘새별오름’ 안내석과 함께 최영 장군의 석상이다. 이곳에서 10㎞ 떨어진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애월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명소이기에, ‘몽골에 맞서’ 싸웠던 삼별초의 수장 김통정 장군이 왜 여기 서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연결이 된다. 그러나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새별오름’ 안내석과 함께 이곳에 서 있을 이유에 대해선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몽골과 결사항전을 준비했던 삼별초와 김통정 장군이 바다 건너 들이닥친 여몽연
▲다양한 역사문화가 깃든 탐라순력도 차귀점부(遮歸點簿)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의 41화폭 중 하나인 차귀점부에는 여느 화폭보다 많은 제주의 역사문화들이 깃들어 있다. ‘점부’란 목사가 순력하는 대신 군관이 점검한 문서를 목사가 확인하는 절차이다. 차귀점부에는 차귀진성을 비롯한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와 우두연대의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지금의 고산포구를 사귀(蛇鬼)포로, 용수포구를 와포(瓦浦)로, 수월봉을 高山(고산)으로 표기하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당산봉 북서쪽 바닷가 절벽에 ‘저생문(這生門)’이라 표기한 점이다. 저승굴 또는 저승문으로 불리기도 하는 저생문은 낭떠러지 해변에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십여 개의 해식동굴을 일컫는 한자어다. 제주어로 저싱고낭이라고 하는 해식동굴들은 끝 닿는 데를 모를 정도로 길고 음산하여 저승문이라 불리어 온다. 바닷새인 가마우지들의 서식처인 저생문 위의 바위는 오래전부터 새들이 남긴 변으로 인하여 하얀색으로 변해 있다. 이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볼거리이다. 당산봉 해안 절벽에 감추어진 듯 있는 저생문 주변을 걷다보면 이곳이 곧 별천지임을 실감한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고려시대 탐라목장이
▲수월봉에 깃든 전설 고산리 수월봉에는 수월이와 녹고 남매의 구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홀어머니의 중병을 낫게 해드리기 위해 남매는 구할 수 있는 약을 모두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울고 있는 남매를 가엽게 여긴 한 스님이 어머니 병에 좋다는 백 가지 약초를 말해 주었다. 99가지를 구하고 마지막 하나를 찾지 못해 걱정하던 남매는 수소문 끝에 수월봉 절벽에 있다는 약초를 발견하였다. 위험도 잊은 채 벼랑 중간까지 내려간 수월이가 약초를 캔 순간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에 바위를 잡았던 손이 풀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수월이의 죽음을 지켜본 녹고는 누이의 시신을 부여안곤 울부짖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후 녹고의 울부짖음이 땅속 깊이 메아리쳐 돌아왔는지, 근처의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 게 아닌가. 효성이 지극한 수월이와 녹고 오누이의 애절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긴 이곳 사람들은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하고, 수월이가 떨어져 죽은 오름을 녹고물오름·물나리오름·수월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수월봉 앞바다는 유난히 물살이 세어 해난사고가 잦았다. 그래서인가 이곳 사람들은 말하길 바다에서 못
▲가작 당선작 웃는 남자 정의양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람의 뒷모습을 어쩌면 저리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편안한 모습이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김홍도의 염불서승도를 바라본다. 운해 속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 한 선승의 참선하는 뒷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삭발한 머리는 달빛에 파르라니 빛나고, 가녀린 목선을 따라 등판으로 흘러내린 장삼이 구름과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하늘은 난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스님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내 얼굴을 생각한다. “얼굴 좀 펴라”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남들처럼 눈 코 입 하나 빠진 거 없는 외모이기는 하나 표정이 없어 그게 문제다. 아마도 삼신할미가 생명을 점지하고, 마지막 미소 한 줌 훅 뿌려주는 의식을 깜박하신 듯하다. 까무잡잡하고 짧은 머리에 비쩍 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매와 콧잔등에 흉까지 있으니 누가 봐도 불편한 얼굴이다. 만남에 있어 첫인상이 중요한데 밝은 표정에 서툰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평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 딴에는 웃고 있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좀 더 활짝 웃으라고 한다. 우거지상을 한 것도 아니고,
◆이번 주부터는 수월봉과 당산봉, 그리고 차귀도와 이웃하고 있는 고산리 지역의 역사문화 발자취를 약 10여 회에 걸쳐 소개한다. ▲비경과 비사가 넘치는 차귀현 고산리 수월봉과 당산봉 그리고 차귀도가 위치한 고산리 지경은 고려시대에는 탐라의 15현 중 차귀현이 있었던 지역이다. ‘차귀’라는 지명은 중국 송나라의 호종단 일행이 탐라의 수맥과 지맥을 끊고 귀향하는 것을 한라산신이 차단하였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지질공원이자 화산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과 명품 해안길인 엉알, 분화구를 숨긴 바다와 다양한 볼거리를 품고 있는 차귀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 선사인이 살았던 한장밭 평야 등 자연과 인간이 세월 속에서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었던 유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신비한 곳이다. 선사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돌화살촉과 돌도끼 등 10만여 점의 선사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이곳에 선사유물전시관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늦은 감이 있다. 이곳은 또한 제주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수월봉 해안에 있는 갱도와 참호는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바다로 직접 돌격하는 일본군 자살특공대 보트와 탄약을 보관했던 곳이
▲탐라국 형성기 거점마을 화순리 선사유적 남제주화력발전소 증설 과정에서 발굴된 화순리 선사유적은 기원전후 2세기경 번성했던 마을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움집터, 저장구덩이, 도량시설,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지와 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화순리 선사마을이 크게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에서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쉽고,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에 유리한 지형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철기와 옥제품의 반입은 이곳이 거점마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돌도끼·갈돌·갈판·숫돌과 같은 석기뿐만 아니라, 그릇과 제기와 같은 토기 제품, 옥으로 만든 구슬과 대롱옥 등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후기에는 산북 지역인 삼양동·용담동에 큰 마을들이 조성되고, 철기시대를 거치며 산남 지역의 화순리·창천리·예래동·강정동 등의 선사마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순리 양왕자터에서 엿본 삼성신화 오래전부터 화순리 333번지 일대를 양왕자터라 불리어왔다. 탐라국을 다스린 으뜸벼슬은 성주와 왕자이다. 국왕인 성주(星主)는 별의 주인이란 의미이고, 왕자(王子)는 왕의 아들이 아닌, 탐라국의 두 번째 벼슬 이름이다. 1300년 고려조정은 제주도를
▲청정계곡 앞막은골 전설 월라봉 동쪽 마을 대평포구 위에는 앞막은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숨어있다. 이곳에는 기암괴석과 왕대들이 하늘을 가리는 보기 드문 곳도 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숨어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굴도 만난다. 이곳이 기암에 막혀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막은굴이다. 막은굴 아래 폭포수와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도 자그마한 굴이 또 하나 있다. 이곳 안마긍굴은 막은굴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제주어 이름이다. 자그마한 폭포 뒤로는 웅장한 바위가 막아서 있다. 폭포에 눈물을 흘리듯 서 있는 기암은 가녀린 여자 형상이다. 그리고 막은골 초입에 바다를 감시하듯 서있는 기암은 속세를 떠난 남자를 닮았다. 오래전 이 고을에 대식이란 총각과 평순이란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대식이가 불가에 귀의하자 평순이는 사랑하는 대식이를 멀리서 바라보다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대식이가 돌이 되어 서 있는 곳에는 선기암(仙起岩)이란 바위가 있고, 바위에는 다음의 한시가 적혀 있다.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티끌이 일어나면/ 그 티끌이 다 낙엽이 되도다. / 낙엽이 떨어진 후에는/
▲오방열吳邦烈:1851(철종2)~1914(일제강점기), 문인, 서당 훈장, 자 태강(泰康). 호 경암(敬庵). 정의향교의 재임(齋任), 본관 군위. 성산읍 신풍리(웃-내끼)에서 오진조(吳眞祚)의 큰아들로 태어나 1874년(고종11)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귀양살이 왔을 때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오방열 부친)의 주선으로 정의현 고을 안의 선비들과 같이 배움을 청했다. 1912년 일본인 관리가 전패를 철거하려 하자 오방열이 다시 성토하니 당국에 체포돼 심한 형독으로 겨우 한 해를 넘겨 사망했다.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당시 정의군수가 일제의 사주에 의해 향교의 전패(국왕의 상징물)를 철거해 외부에 묻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오방열은 서통유사(書筒有司) 김신황(金愼璜)을 시켜 정의현 관내 4개 면의 유림들을 모이게 한 후 결사 항거하게 했다. 그 후 오방열의 뜻을 받들어 유림들은 정의향교 가까이에 있는 의사묘(義士廟)로 새롭게 전패를 옮겨 모셨다. 이러한 사실을 남원면 태흥리의 선비 우석(友石) 김희은(金熙殷)이 광복 후에 ‘정의향교 대성전 전패봉안기’에 기록해 전해진다. 기(記)의 내용은 ‘정의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