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새와 캐초관의 각축장이던 고산평야 화산섬인 제주도는 밭담 천국이다. 제주선인들이 일궈낸 다양한 형태의 밭담은 이젠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되어 영롱한 보물로 진화하고 있다. ‘흑룡만리 제주밭담’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밭 사이에 경계가 없어, 힘센 자들이 약한 자의 토지를 잠식하기에, (1234년) 김구 판관이 지역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선을 구분 지으니 지역민들이 편하였다.’라고 탐라지(1653년)는 전한다. 이러한 역사적 농업유산인 밭담이 고산평야에선 잘 보이질 않는다. 이곳의 농경지는 대개 담이 없는 무장전(無牆田)이다. 돌담 대신 둑으로 밭의 경계로 삼았던 이유가 궁금하다. 고산평야의 무장전 주인들은 공동으로 감시인을 두어 농경지를 관리하였다. 마을에서는 농경지 감시인을 캐초관이라 불렀다. 고광민 제주민속학자가 펴낸 ‘제주 생활사(2016년)’와 ‘고산향토지(2000년)’에 의하면, 고산평야의 캐초관이 하는 일은 마을에서 기르는 농우들과 특히 기러기와 두루미가 농경지에 무단침입 하는 것을 감시하고 막는 역할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말기까지 이 지역에는 소와 말을 키우던 목장인 모동장이 들어서 있었다. 모동장이 위치했던 차귀벵
▲우리나라 최고의 신석기 유물산지 고산리 ‘자구내 뜬밭’ 바다로 에워싼 듯한 제주도는 빙하기엔 대륙과 연결된 육지였다고 한다. 서해 깊은 곳의 수심이 50m 정도이니, 해수면이 150m나 내려가는 빙하기에는 대륙과 연결된 지금의 서해를 사람들은 걸어서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빙하기에 온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란다. 4만년 전 제주도에 건너와 애월읍 빌레못동굴 등지에서 거주한 사람들로 추정되는 구석기인들은 이미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2만여 년 후 다시 찾아온 빙하기를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1만 8000여 년 전 고산리 수월봉 근처 바다에서도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당산봉·수월봉·차귀도 등에서 분출된 화산재가 용암대지를 덮으면서 형성된 넓고 비옥한 대지 위에 드디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곳 고산평야는 1만여 년 전 제주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신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이로부터 제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흔히 ‘한장밭’으로 알려진 선사 유적지를 이 지역에서는 정확한 지명으로 ‘자구내 뜬밭’이라 부른다. ‘뜬밭’은 메마른 농토라는 의미이다. 기존에 알려진 한장밭이 아닌 자구내 뜬밭에서 1987년 이후 다량의 신석기 유
▲이경선李景仙:1914(일제강점기)~?, 서울 동덕여고보 학생 항일 활동, 광복 후에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 본관은 고부. 이도일(李道一)의 장녀로 경기도 안양(安養)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대정읍 가파도(겔파-섬)다. 아버지 이도일(1897~1971)은 한학자로 광복 후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이다. 그녀는 서울의 동덕(同德)여고보에 입학, 동교의 교사 이관술(李觀述·경남 울산)의 지도로 일본으로 건너가 의대(醫大)를 나왔다. 의사 생활이 최후의 목표였다. 이경선은 일본 고베(神戶)시의 ‘나카노(中野)’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효고현(兵庫縣)에서 1941년 12월 9일 체포당하고 1942년 10월 23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오영조(吳榮造·서울)와 만혼(晩婚), 1946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했다. 동년 10월 이재유로부터 숙명여고보 및 기타 여학생에 동지를 획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숙명여고보 3학년 김주원(金周媛)의 집을 방문, 독서회 조직에 대해 찬동을 얻어내고 또 동교의 방봉랑과 신진순으로부터 승낙을 받아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 항일 활동으로 1
▲꽉 짜인 진료 일정에 모처럼 짬을 낸 안과의사 탐이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있다. 몇 미터 떨어진 거리도 카트를 타야 할 정도로 걷기는 싫지만 그래도 골프는 좋아한다. 어프로치 샷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아드님 다니엘이 사망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폭풍을 만났어요.” 명문대에서 박사과정을 준비해온 아들이다. 지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방황하기 시작하더니,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여행을 떠났었다. 걱정이 되고 마음에도 안 들었지만 다 큰 아들에게 아비의 만류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런 아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오려고 홀아비 탐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라는 곳으로 떠난다. 국내에선 개봉된 적 없지만 마틴 쉰 주연의 영화 ‘더 웨이(The Way)’의 오프닝 장면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배경의 영화들 중에선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프랑스 국경을 출발해 스페인 북부를 한 달 이상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수많은 이들의 무덤과 묘비를 만나게 된다. 첫 날 피레네 산맥 해발 1230m 고지에서 만나는 영적인 분위기의 티바울트 십자가도 누군가의 죽음을 연상시킨
▲분화구에서 솟아오른 오백장군 막내바위 차귀도는 제주도에서도 화산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차귀도 전망대 있는 서북쪽 해안은 송이동산으로도 불린다. 가볍고 붉은 화산재인 송이는 격렬한 화산활동의 증거이다. 차귀도 주변에 4~6개의 분화구가 바닷속에 잠겨있어, 단위 면적당 화산 분화구가 가장 많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특이한 지형을 지키듯 우뚝 서 있는 현무암 바위가 오백장군 막내바위이다.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통로인 화도를 따라 분출하던 마그마가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 수월봉과 차귀도 사이에 형성된 분화구의 중심지이다. 송이동산 근처 해변에 우뚝 솟은 장군바위는, 한라산 영실에 있는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인 오백장군의 막내가 바위로 굳어진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온다. 제주창조의 여신인 거녀 설문대할망은 설문대하르방을 만나 낳은 오백장군 아들들을 먹일 죽을 쑤다가 펄펄 끓던 솥에 빠져 죽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제들이 먹은 것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이지만, 막내가 본 것은 어머니의 유골이었다.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을 먹은 형들과 같이 있지 못하겠다며, 막내는 그 먼 길을 실성한 심정으로 걷다가 섬 끝 지점인 이
▲윤정식尹正植:1837(헌종3)~1902(광무6), 일명 경식(京植), 무신, 대정현감. 신좌면(新左面) 북촌리(뒷-개) 윤응철(尹應哲)의 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했다. 1883년(고종20) 6월에 김문주(金汶株)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임명되고, 1884년 1월에 그만뒀다. 1885년(고종22) 5월, 고용진(高龍振)의 후임으로 현감에 도임하고 1886년 5월에 떠났다. 한편, 1887년(고종24) 8월, 은덕중(殷德仲)의 후임으로 재차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888년 10월에 떠났다. 또 재임 중에 늠료(지방 관청의 봉급) 100냥을 가져 대정군의 진수당(進修堂)을 중수하고 아울러 세금을 감면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그에 대한 공적비를 세웠다. 1883년(고종20) 10월, 명월만호 윤정식이 병으로 사임을 요청하니 제주목사 심형택(沈亨澤)은 조정에 “본인으로부터 담벽증(痰癖症)이 겨울에 더욱 심하니 회생하기 어렵다고 보고해 오니 변방 방호의 임무가 중하니 삼읍 출신중 삼망(三望)을 갖추어 해조(該曹)에 보고하니 선처 바랍니다.” 라고 보고했다. 또 심현택(沈賢澤) 목사 재임 시 1884년(고종21) 4월, 관청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이어서 전 만호 김응평
제주에는 비석거리란 지명이 꽤 여러 곳 있다. 저마다 사연과 연유가 담긴 비석들이 한두 개 이상씩 모아져 있다 보니 그렇게 불려온 듯하다. 화북 비석거리도 그들 중 하나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 비석 수가 특히 많다는 게 특징이다. ‘거리’라고 하기엔 짧은 수십 미터 울타리 안에 13개의 오래된 비석들이 가지런히 열 세워져 있다. 3개는 좀 더 우람하면서 머릿돌까지 올려진 상태이고 나머지 10개는 단순한 직사각형 비석들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은 탓에 일반인들이 비문만으로 개개 비석의 의미를 알기는 쉽지가 않다. 이곳 비석들은 1800년대 후반에 제주목에 파견됐던 목사(牧使) 아홉 등 열세 명 지방관들의 선정을 기리는 공덕비들이다. 어려운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휼민(恤民)’,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의미하는 ‘청덕(淸德)’, 사람이 떠나간 다음에 그리워한다는 ‘거사(去思)’ 등의 단어들이 지방관의 이름과 직책과 함께 비문에 포함되어 있다. 비석거리를 벗어나 화북포구와 군데군데 환해장성, 그리고 삼양 검은모래해변과 신촌을 거쳐 조천에 이르면 또 다른 비석거리에 이른다. 이 역시 올레길 노선상이고 18코스 종착지인 조천만세동산까지는 1.5㎞ 남겨둔 지점이
▲원일개元一凱:1883(고종20)~?,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추자면 대서리(당-구미 혹은 큰-작지)에서 태어났다. 1926년 5월에 관제 오용화(御用化)된 어업조합의 착취와 횡포에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김봉수(35)와 박병석(34)은 주민들과 함께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돼 1932년 7월 8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소요죄로 각각 징역 7월을 선고받았다. 원일개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원정미元靜美:1944(일제강점기)~?, 재일교포 동화작가, 본관 원주. ‘제주-성안’ 일도1동에서 태어나 5세 때 어버이를 따라 일본 도쿄(東京)도(都)에 정착했다. 문화(文化)복장학원 제주교포 부현수(夫賢壽)와 결혼, 프로재단 스쿨과 아동문학 스쿨을 수료했다. 아동문학과 의상(衣裳)디자인을 봉합하는 연구에 몰입, 이어 개인전(個人展)과 패션쇼를 개최한 바 있다. 저서 동화(童話) ‘학교의 바람’, ‘할머니의 이야기’, 전국학교도서관협의회 선정한 도서상(圖書賞)을 받았다. ▲원희룡元喜龍:생존,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법학과 졸업.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시험 수석 등 ‘수석’이라는 꼬리표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인 차귀도 2000년에 천연기념물(제422호)로,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된 자그마한 섬 차귀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죽도·와도·지실이섬 등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차귀도에는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역사문화도 가득하다. 가장 큰 섬인 죽도는 동서 길이가 850m, 남북이 300m이고, 사면이 석벽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형이다. 해안과 가장 가까이 있는 섬은 사람이 누운 모습과 같다 하여 눈섬(와도), 서북쪽 섬은 감자를 쪼개 엎어 놓은 것과 같다 하여 지실이섬 또는 독수리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매바위로도 불린다. 임진왜란 전후 왜구가 침범했던 차귀도는 오랫동안 무인도로 남아있었다. 1911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가 다시 무인도가 된 것은 간첩사건 때문이다. 1974년 무장간첩 3명이 추자도에 잠입하고, 추적 과정에서 추자도민 4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차귀도를 포함한 외딴 섬에 사는 주민들에게 섬에서의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2011년 다시 개방된 차귀도에는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집터와 샘터 등도 남아있으며, 특히 1957년 세워진 무인등대가 바닷길을 안내하고 있다. 차귀도 주변 해역은 쿠로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