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한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것이다. 네가 살아가게 될 땅이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만나자꾸나. 그러니 잘 봐두거라. 저 마을을, 이 포구를, 그리고 어미의 타는 가슴을.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너를 지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제주로 가게 되면 너는 일평생 천한 노비로 살아갈 뿐 아니라 이 어미의 욕된 꼴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황경한 네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때론 주리고 고통받겠으나 강인함으로 살아남아 끝끝내 또 다른 생명을 일구어가는 그러한 사내로 말이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거라. 태생에도, 사상에도, 신앙에도……. 천 일 만 일을 하루같이 그리워하고 애태우며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아들아.’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 여인의 일대기를 그린 김소윤 작가의 소설 ‘난주’의 한 대목이다. 초기 천주교인들이 다수 처형되고 유배됐던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주도로 유배 끌려가던 29세 여인 정난주가 추자도 바닷가에 서서 읊조리는 장면에서다. 그녀는 품속 2살 난 아들에게 그가 홀로 남겨질 추자 섬의 풍경을 미
▲민족사상을 지닌 스님들 전국에서 한라산 법정사로 모여들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봉장 강창규(본적은 제주시 오등리이고 당시 주소는 안덕면 사계리임) 스님은, 근대 제주불교 처음으로 1892년 가사·장삼을 두른 출가자로 알려져 있다. 전북 죽림사라는 절에서 사미계를 받은 강창규는 1908년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에서 제주의병항쟁(1909년) 시 의병장을 지낸 김석윤과 방동화 등을 만난다. 그리고 경주 기림사라는 절로 출가한 방동화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던 경북 영일군 출신인 김연일 스님 등을 만난다. 이후 김석윤·강창규·방동화 등의 주선으로 제주도에 온 김연일 스님이 법정사(1911년 창건)의 주지로 1914년 취임한 후, 민족사상이 투철한 여러 스님들이 법정사로 몰려든다. 항일의거의 기운이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의거계획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곳으로 여긴 국내의 여러 스님들이 항일운동 기반조성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18년 6월 김연일‧강창규‧방동화 세 사람은 제주시 산천단에서 의형제를 맺고, 항일거사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가고, 기림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김연일·방동화·김인수 승려 등이 제주시 산천
제주형 청년보장제와 청년 전담 도지사 직속 기구 등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 당선인이 공약했던 청년정책들을 구체화하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어 주목된다. 도지사직 인수위원회 다함께 미래로 준비위원회(위원장 송석언)는 16일 민선8기 제주도정의 청년정책을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수립하기 위한 청년주권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켜다. 청년주권특위는 심화하는 청년문제에 대한 해법을 청년들 스스로 찾아내고 정책에 반영시키는 등 제주 청년들의 정책 결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구성됐다. 청년주권특위는 이날 첫 회의를 가진데 이어 오는 21일 ‘제주형 청년보장제 도입과 추진 방향’을 주제로 한 미래로 도민공감 정책 아카데미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 제주형 청년보장제와 청년 전담 도지사 직속 기구 설립 등 민선 8기 주요 청년 공약에 대한 실행계획과 로드맵을 수립해 오영훈 제주도지사 당선인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오 당선인은 선거 공약을 통해 제주지역 청년에게 생애주기별 맞춤형 종합정책을 제공하는 제주형 청년보장제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형 청년보장제는 청년의 삶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종합정책으로 학업과 취업·창업뿐만 아니라 주거·복지·문화 등 생애 주기별로 안정적 기반을 갖출 수
1801년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대대적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임금이 죽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와 새 집권세력 노론벽파가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조선 땅에 피바람이 불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교인 100여 명이 처형되었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다산 정약용의 집안까지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다산의 작은형 정약종은 사건 초기 붙잡혀 처형되었고, 큰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의 조카 정난주(본명 명련)는 남편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대역죄인의 가족이 되어 두 살 난 아들을 안고 시어머니와 함께 유배길에 올랐다. 한양에서부터 압송되어 내려오다 남도 갈림길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헤어졌다. 한쪽은 거제도, 한쪽은 제주도가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 보자고 울며 다짐했지만 희망 없는 기약임은 두 여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제주 가는 바닷길 중간 기착지인 추자도에 하룻밤 머물면서 난주는 두 살 아기를 바닷가 갯바위 위에 몰래 버렸다. 포교에겐 아기가 숨이 끊어져 바다에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살아나든 아니면 갯바위 그 자리에서
▲나라 위해 목숨 던진 의병 김만석 6월은 보훈의 달이고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 스스로 조직한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민초 김만석을 만나는 날이다. 제주 의병 거사일인 1909년 3월 3일을 앞둔 3월 2일 의병 김만석은 의병장 고승천과 함께 일제에 의해 대정읍과 안덕면 경계지점에서 처형되었다. 동광양 태생인 김만석은 고승천과 함께 대정지역의 모병활동 중 25세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 지낼 가족이 없었던 김만석 의병의 시신은 처형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정 안성리 주민들이 김만석 의병의 시신을 그 장소에 매장하였다. 잡초에 쌓여있던 김만석의 유해는 1976년 당시 남제주군에서 처형 근방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재단장하고 비를 세웠다. 그 후 김만석의 유해는 1977년 사라봉 모충사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의병 김만석의 묘’라는 비석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김만석에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제주 의병항쟁의 진행 과정과 의병장 김석윤 제주에서는 1909년 의병장으로 고승천·이중심·김석윤 세 분이 추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신형李信珩:1911(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광주학생운동 및 일본 오사카에서의 항일활동.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 입당, 본관은 전주, 이항우(李恒雨)의 아들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전남공립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 3학년에 재학 중인 1929년 7월 독서회중앙본부 산하 전남사범학교 독서회에 가입하였다. 1941년 동향의 규수 김정희(金貞姬)와 결혼, 이는 유명한 항일운동가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의 사위인 것이다. 그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살포,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법에서 3년 6월형을 선고받아 항소,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동 회원들은 동년 9월 중순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모임을 갖고 조직을 개편, 그는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조직 강화에 힘썼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의 사이에 격투가 일어나자 광주고보 학생 300명과 전남공립사범학교 학생 및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합동하여 광주 시내의 요소요소에서 항일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학교에서는 11월 4일부터 11
한라산 남쪽 심산유곡에 위치한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를 설문대어린이도서관(관장 강영미) 제주 역사문화 답사팀과 함께 다시 찾았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 답사와 사당인 의열사 참배는 물론, 주변에 있는 하원 수로길과 한라산 둘레길 일부도 한나절 걸려 탐사하였다. 그 먼 길을 버스로 오가며 제주에서의 항일운동의 약사를 공유한 참가자들은, 무오법정사 터로 가는 길이 비경과 비사가 깃든 여행이라며 지인들과 다시 찾겠다는 의지도 들려주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보다도 5개월 앞선 1918년(무오년) 10월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이 전국에서도 제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음이 최근 여러 경로로 알려지고 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강창규 스님 등의 여러 제주선인들과 함께 본토에서 건너온 김연일 등의 여러 선각자에 의해 ‘한라에서 백두로’ 확산되기를 소망하며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마침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질토래비에서는 ‘대정현 동녘 역사문화 깃든 길’의 첫 기행지인 무오법정사 관련 연재에 앞서,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약사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제주에서는 곧잘 3대 항일운동으로 다음과 같이 회자되고 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1
▲이수동李壽童:생몰년 미상, 문신. 중종 때의 제주목사. 자는 대수(大叟), 본관은 전의, 이맹사(李孟思)의 아들이다. 1506년(중종1) 문과 별시에서 정과丁科로 급제, 1526년(중종21) 4월, 김흠조(金欽祖) 목사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28년 12월에 형조참의로 제수되었다. 1526년(중종21) 이수동(李壽童)목사가 춘추봉행제(春秋奉行祭)를 올리기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 1년에 두 번 개최하는 삼성사대제(三姓祠大祭)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삼성사대제(三姓祠大祭)는 탐라 시조(始祖)의 위업을 기리는 유교적 제례의식이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목사 이수동은 1526년 조정에서 진상하기 위하여 감귤 재배를 장려, 도내의 5개 방호소(防護所)(별방·수산·서귀·동해·명월)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소속 군졸로 하여금 수호케 하였다. 또 국둔전(國屯田)을 계파(啓罷)하고 변란을 당하거나 화재 발생 시 구급 용수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성 안에는 우물이 없다고 하여 우련당지(友蓮堂池)를 홍화각(弘化閣) 남쪽에 파서 물을 저장하고 연꽃을 길러 그 위에 우련당(友蓮堂)을 건립하였다. 또 모흥혈(毛興穴)에 돌담을 쌓아 모흥단(毛興壇)을 구축해 보호하고 소비(少碑)와 홍문(紅
온 세상이 하얗던 겨울날, 흰 눈 사각사각 밟으며 집으로 왔다. 읍내 역에 내려 집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버스는 하루 몇 번 없고, 취업도 못한 백수 주제에 콜택시는 사치였다. 마당 넓은 시골 외딴집은 지난 방학 때 잠시 다녀간 흔적 그대로다. 창고에 남아있던 땔감으로 난로에 불 붙이니, 얼었던 몸이 금세 사르르 녹는다. 마루와 방 먼지 대충 걷어내고 재래식 난로 앞에 주저앉았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에 닿은 기분이다. 나른하게 졸려오지만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열차 타기 전 편의점 김밥 하나 먹은 게 오늘 끼니 전부다. 아점으로 점심 거르는 일상이야 다반사라 익숙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달동네 자취집에서 짐 싸 들고 출발해 서울역 거쳐 지금까지 긴긴 하루였다. 어두워진 뒤뜰에 나가 양배추 한 포기와 파 한쪽을 찾아냈다. 눈밭 속에서 눈 알갱이 흠뻑 묻히고 나온 배춧잎은 아삭아삭 싱싱했다. 좀 전에 안친 돌솥에선, 쌀독 바닥을 박박 긁어낸 쌀 한 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밥 한 공기는 넉넉하겠다. 냄비 속에선 배추 듬뿍에 파 몇 조각 들어간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다.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 비우
세계 3대 폭포라면? 남미의 이과수, 북미의 나이아가라,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러면 대한민국 3대 폭포는? 쉽게 떠오르지가 않을 것이다. 좀처럼 그럴 듯한 폭포 이름을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여기저기 폭포는 많겠지만, 특별히 크거나 유명하게 여겨지는 곳은 없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제주도 3대 폭포라면 다르다. 제주사람이 아니어도 한두 개 폭포 이름은 댈 수 있지 않을까? 정방폭포와 천지연 또는 천제연 이름들이 좀 헷갈리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옛 시절엔 신혼부부 등 제주 여행에서는 폭포 방문이 기본 0순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름을 알린 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최근 십여 년 동안에 유명세를 타고 있는 폭포도 있다. 평소에는 존재감 없이 얌전하다가 큰 비가 한바탕 쏟아질 때에만 ‘나 여기 있소’ 하며 굉음과 함께 엄청난 물량을 쏟아낸다. 서귀포시 강정동의 엉또폭포가 그렇다. 잔잔할 땐 바다 밑에 숨었다가 폭풍우 몰아치고 파도 일렁이는 날에만 수면 위로 떠올라 본색을 드러내는 전설의 섬 이어도 같은 행태이다 보니 ‘육지 위 이어도’로 불릴 만하겠다. ‘엉또’라는 지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