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절리 마을 대포동 김순이 시인은 「대포해안에서」라는 시에서 대포 바다를 ‘이곳에 신들이 찾아온다 / 찾아가 보라 그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 등으로 표현하며 극찬했다. 대포 바다의 절경은 지삿개주상절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지삿개의 ‘지사’는 기와(瓦)의 제주어인 ‘지새’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개’는 만입을 이루는 바다이다. 따라서 지삿개는 ‘기와처럼 해안선이 옴폭 들어간 바다’를 의미한다. 드넓은 태평양을 고즈넉이 감싸는 병풍바위들, 천상의 석공들이 내려와 정교하게 쪼개고 다듬은 것 같은 돌기둥들, 가히 신들이 찾아와 노닐만한 궁전 같다. 주상절리는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고결 수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규칙적인 다각형 돌기둥이다. 주상절리 해안을 가는 길은 현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옆으로 출입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포마을로 가는 길이 유일했다. 탐방객들은 대포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묻고 물어 좁은 마을안길과 농로를 어렵게 통과한 후 갈 수 있는 제주도의 흑진주 같은 숨겨진 비경이었다. 우마차와 경운기를 몰고 가다 비좁은 길에서 여행객의 차와 마주쳐도 대포 주민들은 길을 양보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배튼개주상절
조선시대 500년간 제주 사람들에게 섬은 감옥과 같았다. 관료와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가 여름밤 모기떼처럼 극성을 부렸고, 바위투성이 척박한 밭을 죽을 둥 살 둥 일궈보아야 반복되는 흉년에 기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왜구들 노략질이 기승을 부려도 관아는 멀었고, 전복이니 귤이니 ‘나라님이 요구하신다’는 진상품 양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이판사판 심정으로 섬을 탈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거친 바다로 나가 남해안 일대를 떠돌며 유랑민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유민이 늘어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들자 섬의 공동화를 우려한 조선 정부는 1629년 특단의 조치를 발동한다. 바로, 제주인들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바다 건너 육지로 나가선 안 된다’고 하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을 내린 것이다. 그야말로 통치의 편의만을 위해 섬을 감옥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1823년까지 200여 년 지속된 이 조치로 제주 섬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정체될 수밖에 없었고, 섬사람들은 사회 문화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이 시기의 제주인들에게 육지 땅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밟아볼 수 있는 별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제주의 여성들에겐 특히 ‘육지로 시집 갈 수도, 바다를 건널 수도
▲삼본향과 어부당 해녀당 대포에는 신당들이 많다. 이는 해촌(海村)의 거친 바다와 농촌의 척박한 땅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더불어 공존하려는 신앙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대포마을 동쪽에 ‘코뜽이모르’가 있다. 오솔길을 따라 숲속을 가다 보면 삼본향을 만난다.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대포 본향당이다. 불묵당에서 궷돌 하나를 모셔다 본향을 설립한 것으로, 당에는 멩실·백지·물색 등이, 신낭(신목) 가지에는 당걸이가 걸려 있다. 마을의 성소인 본향당은 하늘과 통하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주민들은 당신(堂神)에게 빌면 생산·산육·치병이 이루어지는 영적 공간으로 여겼다.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토산당’이 있다. 본향당과 요드렛당 사이에 있어 ‘샛당’이라고도 한다. 달리 ‘동읫본향’이라고도 하는데, 동쪽 정의고을에서 모시는 신위가 좌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토산당은 칠성(뱀신)을 모시는 당이다. 칠성은 곡물을 보호하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다.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보면, “제주 풍속에 뱀을 신이라 해서 받든다. 이것을 보면 술을 주고 주문을 외우며 신으로 여겨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토산당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요드렛당’이 있다. 가장 아래쪽
테아나우 호수는 넓기로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인, 서울 면적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바다 같은 호수’가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 시간 이상 주변 설산들의 위용에 넋을 빼앗기다보면 어느 순간 배는 호수의 북단 선착장에 이른다. 배에서 내리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발 소독. 소독제가 들어있는 넓은 용기 속에 잠시 신발을 담그고 나오면 비로소 밀포드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바로 눈앞 녹색 이정표에 ‘Milford Track(밀포드 트랙)’이라는 노란색 글씨가 선명하다. 꿈에 그리던 바로 그 밀포드 앞에 내가 서 있다. 짙은 적갈색 흙길에 발이 닿는 느낌이 푹신하다. 생소한 느낌의 나무들이 가득하고 가지마다 이끼 식물들이 얽히고설켜 치렁치렁 늘어져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봤을 법한 묘한 분위기의 원시림 속을 한 줄로 이어진 오솔길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길게 들이마시는 청청 대자연의 대기 한 모금 한 모금이 그 짧은 2~3초 동안에 허파 구석구석을 누비고 나와선 다시 자연 속으로 내뱉어진다. 얌전히 정체돼 있던 온몸의 실핏줄과 근육 세포들이 새 생명에 자극 받은 듯 잠에서 깨며 기지개를 펴는 과정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올레 14-1코스의
▲제주삼현도에서 본 존자암과 대포 1750년경에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첩인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를 보면, 백록담 남서쪽 한라산 바로 아래에 절이 그려져 있다. 사찰 이름이 없어 확실치는 않지만, 위치상으로 보아 존자암으로 판단된다. 존자암의 정남쪽 해안가에는 대포촌과 대포연대가 표기돼 있다. 저 멀리 남쪽으론 유구(琉球, 오키나와)·안남(安南, 베트남)·섬라(暹羅, 태국)·여인국(女人國, ?)·만랄가(萬剌加, 말레이시아) 등도 보인다. 당시 선조들의 지리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천혜의 양항(良港) 대포포구 대포포구의 지세를 보면 남쪽은 태평양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북쪽에는 한라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동서쪽에는 좌청룡 우백호에 비견되는 구릉지들이 대포포구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대포포구의 서쪽에 ‘자장코지’, 동쪽에 ‘모살넙개’와 ‘큰여또’에서 뻗어 나간 수많은 바위와 여(礖)들이 포구를 감싸고 있다. 이들 거대한 바위들은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천혜의 양항(良港)이다. ▲대포포구에서 존자암으로 가는 중질 존자암은 영실 서쪽에 있는 볼레오름(佛來岳)의 해발 약 1200
올레 11코스 후반에 지나온 신평곶자왈은 나처럼 소심한 이들에겐 혼자 걷기가 으스스한 구간이다. 방심하다간 길을 잃을 위험도 있다. ‘통신 불통’이라는 푯말도 자주 눈에 띈다. 깊고 깊은 숲길이다. 비 오는 날이나 해 저무는 시간이면 올레 노선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우회하는 게 좋다. 곶자왈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며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을 걷는 동안 숲속에서 딱 한 사람을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그냥 지나쳤다. 좁은 숲길 커브를 돌았는데 갑자기 100미터 앞에 누군가가 보여 순간적으로 움칠했다. 자그마한 키의 여성 복장이다. 내 발자국 소리에 상대방도 약간 당황한 모양새다. 뒤를 돌아본 건 아니지만 멈칫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상대방 걸음이 갑자기 빨라짐을 알 수 있다.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냥 뒤돌아보며 서로 인사 한마디 하면 자연스러울 텐데…. 혼자 아쉬워하며 뒤를 따랐다. 걸음이 빠른 내가 상대방을 쫓아가는 형국이라 난처했다. 맑은 날이었지만 좁고 침침한 숲속이다. 여성 혼자로는 충분히 긴장할 만도 하겠다. “저기요~ 제가 먼저 앞질러 갈게요~” 뒤쫓아 오는 남성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뚝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숲길 옆으로 가만히 비켜선다.
▲대포의 방어유적과 마을 유래 이형상 목사가 제주도를 순력할 때 화공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1702)』의 <한라장촉>을 보면, 대포 지경 중산간지역에 동해진성[동해방호소], 해안지역에 대포연대가 그려져 있다. 동해진성 지척에는 구산봉수도 보인다. 대정현 동쪽을 방어하는 통신 군사시설들이 이 지역에 몰려있어 조선 때 대포 일대는 한라산 남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대포(大浦)의 옛 지명은 ‘큰개’다. 제주에서는 만처럼 바다가 육지로 옴폭 들어온 곳을 ‘개’라고 하고, 반대로 육지가 바다로 뾰족 돌출한 곳을 ‘코지’라 한다. ‘큰개’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大] 개[포구: 浦]’이다. 대포마을의 역사는 큰개 포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선사시대부터 거주했던 흔적들이 있다. ‘오뎅이궤 바위그늘’, ‘선궷내깍 서쪽 대지’, ‘대포해안 바위그늘’ 등에서 무문토기, 적갈색토기, 마제석창, 동물뼈 등, 다양한 선사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존자암 및 법화사의 관문 기능과 동해진성의 군사방어 기능 등을 관련지어 봤을 때, 일찍부터 대포 지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 동쪽 인근의 ‘시오름 주둔소’ 지난 호에 연재한 영남리에서 동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오름 주둔소를 다시 찾았다. 시오름 주둔소는 제2산록도로와 1100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숨어 있었다. 영남천과 악근천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곧 제6산록교가 나타나고, 그 동쪽에 위치한 동백꽃 안내판에서 남쪽으로 300m 남짓 내려가면 성채 같은 시오름 주둔소가 나타난다. 시오름 주둔소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경찰토벌대가 무장대와 민간인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감시하려 한라산 주위에 설치한 40여 주둔소 중 하나이다. 서귀포시 서호리 마을의 중산간에 위치한 ‘시오름 경찰 주둔소’는 1950년대 초반에 중산간 마을인 서호리와 호근리 주민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인 강정리와 법환리 등지의 주민이 총동원되어 한 달 만에 쌓았다고 한다. 주둔소를 구축하려 동원된 마을 중에는 주둔소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영남리 마을은 없다. 영남 마을은 4·3 초기인 1949년 초에 완전히 폐촌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오름 주둔소는 삼각형 모양으로 한 면의 길이 40여m, 높이 3m, 폭 1m, 전체 둘레는 120m 정도이다. 1950년 초
▲무오법정사 아랫마을 영남리 가는 길 신록이 우거진 산록도로를 달리다 눈에 자주 띈 이정표가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이다. 영남동 주변에는 ‘무오법정사’뿐만 아니라 ‘시오름주둔소’라는 역사적 유적지도 이웃하고 있다. 한라산 남쪽 아랫마을 영남리는 4·3 때 사라진 마을로 자주 회자되는 ‘화북의 곤을동과 동광리의 무등이왓’과 더불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고 아프게 하는 이름이다. 한때는 지명으론 남아있으나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은 마을로 ‘영남리’가 제주도에서 유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영남리에는 1960년대부터 외지에서 들어와 대를 이어 거주하는 전대희(1952년 생)씨 형제와, 영남리 마을에 들어선 무주선원라는 암자에 여승 한 분이 살고 있다. 답사팀은 전대희 님의 안내로 지금도 물이 고이는 우물 등 영남리의 옛 가름 도처를 누볐다. 영남리 마을 사람들은 초기에는 목축과 더불어 화전(火田)을 일구어 비탈진 곳을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주 작물은 조·고구마·메밀·콩·산디 등이었다. 마을에는 계단식 화전인 다랑이 밭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올레와 대나무가 무성한 집터와 밭담, 여러 곳의 우물과 통시도 그대로 남아있다. 울창한 팽나무 아래에는 ‘잃어버
▲이운강李雲岡:1885(고종22)~1972, 황해도 장연 출생. 1919년 만주의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양성소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 사령관의 요청으로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설치된 무관연성소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북로군정서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1925년 재만(在滿) 각지 민선대표 18명과 국내의 단체 대표 9명이 모여 항일민족 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자, 이에 활동하다가 일제 앞잡이의 모함으로 영고탑(寧古塔) 감옥에 6개월간 수감되었다. 광복된 후 국군 창설에 참여하고 1955년경 육군 중령으로 제주병사구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예편(豫編)되면서 생활근거지를 제주시로 정하였다. 1957년 4월 5일 ‘제대장병 보도회’를 대한상무회(大韓尙武會)로 개편하여 제주도지부장에 피선, 1972년 사망 후 제주에 묻혔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원달李源達:1783(정조7)~?, 문신. 헌종 때의 제주목사. 자는 백심(伯深)이고 본관은 전주, 현묵(顯默)의 아들, 1835년(헌종1)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