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강릉 24.2℃
  • 구름많음서울 20.0℃
  • 구름조금인천 19.8℃
  • 구름많음원주 19.7℃
  • 구름조금수원 21.2℃
  • 구름많음청주 21.7℃
  • 구름많음대전 21.9℃
  • 구름많음포항 20.2℃
  • 구름많음대구 22.3℃
  • 구름많음전주 23.8℃
  • 구름많음울산 22.9℃
  • 맑음창원 24.0℃
  • 구름조금광주 22.5℃
  • 구름조금부산 21.9℃
  • 구름조금순천 22.4℃
  • 구름많음홍성(예) 21.7℃
  • 맑음제주 22.9℃
  • 맑음김해시 24.4℃
  • 구름조금구미 22.1℃
기상청 제공
메뉴

(제주일보) [이영철의 제주여행]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거상 김만덕

(15)김만덕 기념관
흉년에 도민들 기근 시달리자
전 재산 처분해 진휼미 마련
가상히 여긴 정조, 벼슬 내려
제주 女 최초 한양·금강산 유람

 

조선시대 500년간 제주 사람들에게 섬은 감옥과 같았다. 관료와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가 여름밤 모기떼처럼 극성을 부렸고, 바위투성이 척박한 밭을 죽을 둥 살 둥 일궈보아야 반복되는 흉년에 기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왜구들 노략질이 기승을 부려도 관아는 멀었고, 전복이니 귤이니 ‘나라님이 요구하신다’는 진상품 양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이판사판 심정으로 섬을 탈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거친 바다로 나가 남해안 일대를 떠돌며 유랑민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유민이 늘어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들자 섬의 공동화를 우려한 조선 정부는 1629년 특단의 조치를 발동한다. 바로, 제주인들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바다 건너 육지로 나가선 안 된다’고 하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을 내린 것이다. 그야말로 통치의 편의만을 위해 섬을 감옥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1823년까지 200여 년 지속된 이 조치로 제주 섬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정체될 수밖에 없었고, 섬사람들은 사회 문화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이 시기의 제주인들에게 육지 땅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밟아볼 수 있는 별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제주의 여성들에겐 특히 ‘육지로 시집 갈 수도, 바다를 건널 수도 없다’는 ‘월해금법(越海禁法)’이란 법령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 섬을 벗어나 한양을 거쳐 금강산까지 유유히 여행을 다녀온 제주인이 있었다. 그것도 여성, 노년의 독신 여성이다. 그녀가 거쳐 가는 전국의 관할 관아엔 ‘모든 편의를 모자람 없이 제공하라’는 어명까지 내려졌다. 제주 여인 김만덕은 환갑에 이른 나이에 임금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며 최고급의 육지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김만덕은 젊을 때 한동안 기녀였다. 원래는 양갓집 2남1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나 12살 때 부모 잃고 고아가 되면서 기생집 몸종으로 맡겨진다. 늙은 기녀의 눈에 들어 그녀의 수양딸이 되었고 처녀로 성장한 다음엔 자연스레 기녀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어린 나이에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며 세상의 이치에 일찍 눈을 뜬 김만덕은 20대 중반 나이가 되자 평생을 천민인 기녀로 살아갈 자신의 미래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당차게 관아를 찾아가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빼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린 덕에 원래의 양인(良人) 신분을 되찾는다. 그간 아껴 모은 돈으로 포구 인근에 객줏집을 차렸고 초반부터 성황을 이룬다. 십수 년 기방 안팎에서 보고 익히며 터득한 자세와 마음가짐이 장사에 큰 밑천이 된 듯하다. 음식과 숙박을 기본으로 위탁판매와 매매중개 등 교역과 유통 쪽으로 다각화되며 사업은 번창해갔다. 제주 특산물들을 고가에 육지로 내다 팔고, 쌀 등 육지의 생필품들은 값싸게 대량으로 섬에 들여오는 유통방식이 주효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김만덕은 제주와 남해 일대를 주름잡는 거상(巨商)으로 변모해 있었다.

 


김만덕이 50대 중반을 넘어설 즈음 제주엔 4년 연속 흉년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근에 시달리며 굶어 죽는 이가 수만 명에 이르자 조정에선 화급하게 구호곡물을 마련해 실어 보내는데 이마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해버리고 만다. 이때 김만덕이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고 나선다.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즉각 처분하여 육지에서 양곡을 사 들여 진휼미로 내어놓아, 도민 전체가 아사로 내몰리던 제주 섬은 만덕의 진휼미 덕택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바다 건너 한양에까지 알려졌고 이를 가상히 여긴 정조 임금은 제주 목사를 통하여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었다. 부귀나 영화를 원하는 것도 아닌, 그저 “육지에 올라가서 임금이 계신 한양 구경하고 금강산 유람하는 게 소원”이라고 김만덕은 답했다. 평생 섬 밖으론 나갈 수 없는 제주 여인 신분으로선 육지 여행은 절실한 꿈이었을 터이지만, 임금 눈에는 이런 소박한 요청이 갸륵하고 기특하게 비쳐졌는가 보다.

여행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모자람 없이 제공하라는 어명이 곳곳에 하달되었고, 김만덕은 제주 여인 최초로 임금의 은덕을 입은 최고급 육지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임금을 알현할 수 없는 그녀의 법적 신분을 해소해주려고 왕은 그녀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까지 내려 김만덕은 정조를 알현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같으면 청와대 의료팀 수간호사 정도의 직책일 텐데 당시로선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다고 한다.

 

 

 

김만덕의 덕행도 덕행이었지만 그녀의 두 가지 소원이라는 것이 장안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고 여기에 임금이 내린 여러 조치까지 이슈가 되면서 김만덕은 일약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때가 정조 21년(1797년) 59세의 그녀는 한양 도성의 공경대부와 선비들의 칭송을 받으며 금강산 여행까지 마쳤고, 이어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 15년간 제주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다가 74세에 눈을 감는다.

김만덕 사후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도록 제주도민들에게 칭송을 받자, 그녀의 선행을 기려 그녀의 3대손인 김종주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 현재 이 편액은 김만덕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3층 전시실에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다.

동문로타리에서 맑디맑은 산지천 물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호젓한 산짓물공원 맞은편에서 우람한 현대식 건물을 만난다. 김만덕기념관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어렵게 일궈낸 평생의 성취를 이웃이 어려울 때 아낌없이 나눴던 김만덕 정신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모토로 2015년 개관했다. 3층의 상설 및 기획 전시실부터 2층 체험관과 자료실 그리고 1층 만덕갤러리까지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올레길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한 시간 정도 둘러본다면 2~300년 전에 살았던 특별한 제주인의 예사롭지 않았던 삶과 마주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