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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17세기 중엽 제주의 모습 고스란히 옮겨 담았다

(221) 제주목사 이원진
이운강, 청산리전투 공 세워…제주병사구사령부 참모장 등 역임
이원달, 목민관 지내며 민폐 근절…도민들 나서서 추사비 건립
이원진, 탐라지 저술…제주안핵어사 이경억 제의에 대정향교 이설

 

▲이운강李雲岡:1885(고종22)~1972, 황해도 장연 출생. 1919년 만주의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양성소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 사령관의 요청으로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설치된 무관연성소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북로군정서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1925년 재만(在滿) 각지 민선대표 18명과 국내의 단체 대표 9명이 모여 항일민족 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자, 이에 활동하다가 일제 앞잡이의 모함으로 영고탑(寧古塔) 감옥에 6개월간 수감되었다.

광복된 후 국군 창설에 참여하고 1955년경 육군 중령으로 제주병사구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예편(豫編)되면서 생활근거지를 제주시로 정하였다.

1957년 4월 5일 ‘제대장병 보도회’를 대한상무회(大韓尙武會)로 개편하여 제주도지부장에 피선, 1972년 사망 후 제주에 묻혔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원달李源達:1783(정조7)~?, 문신. 헌종 때의 제주목사. 자는 백심(伯深)이고 본관은 전주, 현묵(顯默)의 아들, 1835년(헌종1) 문과 증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3) 11월, 조우석(趙禹錫)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39년 3월에 사직을 하고 떠났다.

또 목민관으로서의 ‘경민편(警民篇)’을 새로 간행, 각 마을마다 나누어 배포, 치정이 맑아 곡부(穀簿)를 정확히 정리하고 민폐를 근절하니 도민이 추사비(追思碑)를 건립해 그를 기렸다.

1832년(순조32) 8월 경기도 연천현감(漣川縣監)에 부임하고 1835년 5월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떠났다. ‘사상이공원달거사비’가 현재 조천리 비석거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또 현재 화북동 비석거리에는 ‘목사이공원달휼민선정비(牧使李公源達恤民善政碑)’가 있으며 1840년(헌종6) 5월에 세운 것이다.

1838년에 평역미(平役米)를 매 4두(斗)씩마다 4승(升)을 감해 주었다.

또 이때에 본도 사람 고한록(高漢祿)이 표류되었다가 귀환하였다.

이에 앞서 고한록은 중국에 표류, 그 곳에서 환대받아 의복과 은자(銀子)를 주니 받아가지고 북경에 도착, 거기에 가 있던 우리나라 사신을 따라 귀환하였다.

이후로부터 의복과 은자를 탐내어 동료들을 종용하여 말린 양식을 준비해서 표류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목사 이원달은 조정에 계청, 고한록을 참형시켜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모흥혈(毛興穴·삼성혈)을 파서 살펴 옛 것을 찾아보려 했으나 고량부 삼성 후예들이 회곡(會哭)함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1838년 7월에 제주백성 고한록(高漢祿)은 1827년(순조27)부터 그 후로 비밀리에 무뢰한을 모집, 배를 훔쳐서 고의로 표류하여 중국에 깊이 들어간 것이 네 차례에 이르렀다.

필담으로 통역하여 색전환은(索錢幻銀)하였으니 중죄에 해당된다. 국경을 범(犯)한 법에 의하여 해당 목사에 분부하여 군민(軍民)이 모인데서 효수하였다.
 

 

▲이원진李元鎭:1594(선조27)~?, 문신. 제주목사. 본관은 여주, 최초의 탐라지 저술,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판서 지완(志完)의 아들, 1630년(인조8)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651년(효종 2) 7월, 김수익(金壽翼)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53년 10월에 떠났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남만인(南蠻人) 30여 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원진은 1615년(광해군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執義) 등을 거쳐 1647년 승지에 올랐다.

1644년 교리로 있을 때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경흥(慶興)·경원(慶源)·온성(穩城) 등지에 침입하여 횡포를 자행하던 여진인에 대하여 조정의 명으로 그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또 1648년에는 왕명으로 별시문과에서 초시를 파하려 하자, 그 부당성을 강력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 때에 동래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초에는 병조참의·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탐라지(耽羅志)’가 있다. 탐라지는 1653년(효종4) 이원진의 편찬한 제주도의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읍지이다. 1책의 목판본으로 제주의 석학인 전적 고홍진(高弘進)의 감교(監校)로 완성되었다.

내용면에서 제주의 자연환경으로부터 인물·시문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특성을 매우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여 17세기 중엽의 제주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풍속조에는 외지인의 입장에서 본 제주도의 독특한 환경 및 풍속을 기록하였다.

목사 이원진은 부임하면서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따라서 세병헌(洗兵軒)이라 하는 현판을 걸었다. 1652년(효종3) 봄에 제의하여 차귀진(遮歸鎭)을 계설(啓設), 군대가 주둔했다.

차귀는 본래 원나라 합치(哈赤)가 축성한 곳으로 말을 길러 이를 출륙하던 곳이다. 차귀진의 석축성의 둘레는 2466척이고 높이는 22척이며 동·서 양문 위에 초루가 있고 성안에는 객사·군기고 등이 있다.

또 진에는 조방장 1명, 치총(雉摠) 2명, 서기 8명, 방군(防軍) 121명, 방포수(放砲手) 3명, 궁인(弓人) 3명, 시인(矢人) 3명이 배치되었다.

1653년(효종4) 가을에 ‘탐라지’를 완성, 수차의 변란과 문헌이 없어 여러 사서(史書)를 보고서 제주의 역사를 바로잡았는데 이 ‘탐라지(耽羅志)’를 소위 구탐라지라 하고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지은 것을 신탐라지라고 통칭하고 있다.

이 해 가을 큰 풍수해로 주성 남·북수구(南北水口)·홍문(虹門)이 저절로 무너져 이듬해 봄에 이를 복원, 또 1653년 봄 대정향교를 이설하였다.

본시 향교가 대정성 안에 있었으나 제주안핵어사 이경억(李慶億)이 와 보고서 부지가 낮고 습기가 차며 비좁아 이설을 제의한 바 있었다.

현재 단산(簞山) 밑에 있는 대정향교는 바로 이원진이 이설한 향교이다.

문헌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사상’에 보면 “반계는 이원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언급했다. 이원진은 반계의 외숙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원진은 실학에 깊은 개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