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李基豊:1865(고종2)~1942, 외지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들어간 첫 기독교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의 항일활동. 기독교의 장로교 목사. 제주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평양에서 태어나 1883년까지 한학을 수학, 1903년 외국 선교사 마펫(馬布三悅)의 권유로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4년 뒤에 제1회로 졸업한 7명 중 한 사람으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곧 독로회(獨老會)의 결의로 1908년 겨울 인천항을 떠나 목포를 경유 제주에 상륙, 제주 성안 선교 사업에 들어갔다. 뒤에 중인문(重仁門) 초가 두 채를 매입, 바깥채를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910년 삼도리 옛 출신청 청사를 매입, 교회를 설립해 1915년 조선총독부에 신고 계출하니 이곳이 성안(城內)교회로서 본도 기독교 교회의 효시(嚆矢)이다. 구한말에 유배된 박영효(朴泳孝)가 구 한화(韓貨) 100원을 연출(捐出)하자 매입이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세례를 받은 김재원(金在元)과 더불어 전도한 결과 다수의 신도를 확보했다. 1917년 시무(視務)하던 제주도를 떠나 이듬해 광주의 북문내(北門內)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했다. 1920년 전라노회장(全羅老會長), 조선예수교 장로
우리네 몸과 마음의 상처란 결국은 아물게 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대개는 조금씩이라도 자연치유가 된다. 세월이 가면서 상처 자체가 잊혀지기도 한다. 한번 겪었던 어떤 아픔을 평생 느끼며 살 필요는 없도록 해주는 조물주의 배려인 것이다. 치유되지도 않고 잊혀지지도 않아서 조물주도 어쩌지 못하는 예외인 경우도 있다. ‘진아영’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할머니의 경우가 그랬다. 젊었을 땐 이름만큼 얼굴도 고왔고 아름다웠다. 그랬던 옛 시절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턱을 잃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아래 턱 전체가 날아간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리곤 계속 살았다. 약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시간들을 무려 55년이나 살아냈다. 그리곤 2004년 9월에 비로소 세상과 이별했다. 향년 90세, 결혼도 한 바 없고 자식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 턱이 없는 흉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늘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았다. 생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겐 ‘무명천 할머니’로 불린다. 1949년 1월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지 5개월째 접어든 때였다. 4.3사건이 일어난 지는 벌써 10개월째,
▲영락리 바닷가에 일제가 파헤친 해안참호와 갱도진지 바닷가 마을 용수리는 당산봉·수월봉·차귀도의 북동쪽에 있고, 해안참호와 갱도진지가 있는 영락리는 그 남서쪽에 있다. ‘덕자리돔’이라는 마을축제가 열리는 영락리 바닷가에는 특히, 1945년 초 일제가 파헤쳐 놓은 참호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수심이 깊은 ‘목저문여덕과 전세비덕’이란 바닷가 사이에 있는 해안참호는 일제가 한경면 고산리 해안과 대정읍 송악산 해안에 구축한 ‘결7호 특공진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일제는 이 중간지점을 고산과 대정 양쪽의 특공진지로 향하는 미군의 전함을 감시하거나 포격할 수 있는 지형으로 여겨, 이 일대에 해안참호와 갱도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의 해안참호는 길쭉한 바닷가 바위를 엄폐 내지는 보호벽으로 삼아, 그 반대쪽 바위 밑에 깊이와 폭 1m, 길이 수십 m 정도로 파헤쳐 만들어졌다. 일제는 또한 영락리 바닷가 근처에 있는 돈두악 오름에도 여러 갱도진지를 구축하였다. 해안참호와 갱도진지를 안내한 영락리 출신 송한진(1950년 생) 님은 어릴 적 돈두악 정상 주변에 있던 지하갱도에도 동무들과 어울려 수차례 들어갔다고 한다. 흙 등으로 입구가 메워져 있는 지역을 안
지속가능한 제주관광은 환경·경제·사회문화 구성원들이 지속적인 균형을 이루는 생태관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균형적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은 생태계 보전, 제도 및 환경 관리 능력, 자연보호구역 지정, 동식물의 다양성 등으로 볼 수 있다. 제도에 포함되는 지표로는 친환경적 경영제도 수립, 친환경 교통수단 구축, 대기오염 관리 체계, 자연휴식년제, 기후변화 대응 체계 구축 등이 있다. 환경 관리 능력으로는 대기 질 청결 수준, 수자원 관리 체계, 쓰레기 관리의 효율성, 하수처리 시스템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 지속가능성은 경제적 편익, 고용, 연관 산업을 포함한다. 경제적 편익을 측정하는 요소로는 관광객 수 1인당 수입 및 지출 정도, 관광객의 체류 기간과 재방문율이 있다. 지역고용으로는 관광업 종사자의 정규직 수와 복지 수준을 포함한다. 사회문화적 지속가능성은 주민의 삶의 질, 지역문화 유지 및 사회의식 등이다. 주민생활과 관련되는 요소는 치안 안전, 인구 변동 정도, 관광객에 대한 주민 인식, 관광개발에 따른 갈등 요인들을 포함한다. 지역문화자원 보존 등 사회의식을 표준으로는 신뢰를 포함한 관용 수준을 나타낸다.
여인은 늘 외톨이였다. 외딴 집에 홀로 살았다.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인은 오랜 세월 신경쇠약 환자였다. 마을에선 공인된 사실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이웃과 싸움이 붙었다. 그 집 멍석에 널어놓은 메주콩 두 말이 없어진 모양인데 콩 주인이 외톨이 여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억울한 여인은 펄쩍 뛰며 소리소리 질러 아니라고 항변했다. 콩 주인과의 말싸움은 살벌하게 평행선을 긋다가 어느 순간 여인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면 경찰서 가서 따지자’며 콩 주인이 팔을 끌자 여인은 벼락치듯 뿌리치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그리곤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고만 있었다. 모여든 구경꾼들 눈엔 누가 봐도 ‘도둑 제 발 저린’ 꼴이었다. 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멀리서 군인 모습만 보아도 얼른 몸을 숨기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그 여인은 어느 날 자기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주변에 남겨진 알약들로 보아 자살이었고, 사망한 지는 한 달 가까이 된 듯 보였다. 평지보다 푹 파인 그 옴팡밭은 30년 전 마을 사람 수백여 명이 한날한시에 군인들에게 총살된
질토래비에서는 앞서 17회에 걸쳐 월라봉에 깃든 역사문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에 덧붙여 소개되어야 할 비경과 비사가 있다는 지역인사(김형필 직전 안덕면장)의 제안으로, 질토래비에서는 다시 수차례 월라봉에 있는 오색토굴과 백토굴, 아리랑 고개 인근 협곡에 있는 저수지, 그리고 군산 서쪽 중허리에 있는 채석장 등지를 탐사했다. ▲월라봉 이두어시(泥頭於時)에 있는 오색토굴과 백토굴 탐사 지난여름 찾지 못한 오색토(백청적녹갈색)굴과 백토굴을, 김창남 대평리장 일행의 안내로 탐사했다. 월라봉 동쪽 평지에 24가구가 살았던 이두어시 지경(감산리 819번지)에 있는 오색토굴 입구는 수림에 가려져 지나쳐가기 쉬운 곳이다. 좁다란 입구를 통해 오색토굴로 기어 들어간 일행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기어 다니며 탐사를 했다. 오래전 선인들이 오색토와 백토를 120여 m 파 들어가 채취하다 생긴 지하 공간이 오색토굴이고 백토굴이다. 천장 높이가 50㎝에서 2m 정도인 굴 내부는 갱도 받침목도 설치하지 않은 채 오색토를 파내던 선인들의 삶의 현장이다. 오색토굴의 비경을 본 일행들은 근대 산업유산으로 지정될만한 하다며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흑굳밧이라 불린 밭 주변에 있던 샘에서는
▲지방기념물(제9호)로 지정된 용수리 ‘節婦岩(절부암)’ 차귀도가 지척에 떠 있고 호화 요트도 오가는 용수리 바닷가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용수포구 맞은편에 조성된 소공원의 자연석에 새겨진 ‘節婦岩’이란 글자를 감상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바닷가 절벽에 전서체로 또렷하게 새겨진 節婦岩이란 마애명은 남편을 따라 순절한 제주고씨를 기리는 기념물이다. 소공원 절벽에는 또한 당시의 제주판관 신재우가 제명(題名)하고, 김응하가 글을 쓰고, 이팔근이 조각하였다는 마애명도 있다. 절부암 마애명의 주인공 제주고씨는 1835년 한경면 저지리에서 태어나 용수리에 사는 어부 강사철과 1853년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한 그해 겨울 고씨남편이 동승하고 바다로 간 배는 불행하게도 돌아오질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 다음 날 해안가에 떠오른 시신에는 고씨남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3일 밤낮으로 바닷가를 헤맸으나 남편을 찾지 못한 부인은 섣달 보름날 소복으로 단장하곤 ‘엉덕동산’ 후박나무에 목매 죽으니, 방년 19세였다. 그러자 하늘의 부름처럼 아내가 목매 숨진 바닷가에 이내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 애절한 사연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은 후손 없이 생을 마감한 가련한 부
▲이기동李琪同:1907(융희1)~?, 원적은 목포, 공산주의자동맹 항일 활동, 본관은 경주. 이보현(李甫賢)의 아들로 추자면 신양리(장-작지)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사립 중앙고보 제4학년 재학 때인 1927년 11월 5일 학생들이 맹휴(盟休)에 돌입, 이에 일경은 1·2차에 걸쳐 134명의 학생을 검거해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 이기동 등 주동 학생 6명은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송치됐다. 1936년 3월 20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항일운동으로 1934년 12월 4일 이기동, 김정수(해남 출신) 등 7명을 송청, 이들의 주장은 첫째 학생 본위의 교육, 둘째 학생 자치권 부여 등이었다. 그 후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중퇴, 귀국해 목포에서 해산물 매매업 및 수송업에 종사했다. 1932년 4월 목포 북교동 50번지에 살면서 극비리에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하고 조직부를 담당, 동년 8월 이 단체를 레닌주의자동맹으로 명명하고 1933년 3월 다시 공산주의동맹으로 개칭했다. 또 1934년 2월 ‘목포 노동조합 조직준비위원’이 돼 조사 사업 및 강령 등을 작성하던 중 해남(海南)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목포에서
▲당산봉이 품은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 고산리 자구내와 이웃하는 당산봉 남서쪽 중허리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특히 이곳에는 고인돌로 보이는 바윗돌 두 개가 이웃하고 있다. 길이 약 3m, 폭 2.5m, 두께 1.5m 정도의 두 바위는 당산봉 도처에 박혀 있는 암석들과는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어, 주변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 최초의 마을이 자구내 뜬밭에 들어선 점으로 보아, 이 바위들은 마을 지도자의 무덤인 고인돌이라는 추정이 지역에서도 전해 오고 있다. 차귀현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또 있다. 이곳 고인돌은 받침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반면, 인근 마을인 저지리에 위치한 문도지오름 중허리에 있는 고인돌로 보이는 바위에는 받침돌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선사유적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각지에 7만여 기가 있다는 고인돌 중 절반 이상인 4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한다. 고창 고인돌 군락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제주도에 등재된 고인돌은 100여 기이다. 1950년대 기록에 의하면 제주시 용담동 일대에 3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10기 정도
“여기가… 어디인고?” “… …” “답답하구나. 여기가 어디더냐?” “예~ 제주 땅 어등포라 하옵니다.” “뭣이라? 제주?” 청천벽력이었다. 호송 책임자인 별장(別將)이 옆에서 뭐라고 설명을 하는 듯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망연자실한 왕은 혼자 뇌까린다. 열 몇 시간 여 험난한 뱃길, 속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죽는 줄 알았다. 강화 교동도를 출발할 때만 해도 전에 갔던 태안으로 다시 보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길어지는 걸로 보아 멀리, 아주 멀리 남해의 어디 자그마한 섬으로 보내지는가 싶어 깊이 절망했다. 남해는 아득히 멀다. 한양에서 멀어질수록 왕좌 복귀의 꿈도 멀어지는 것이다. 머리엔 두건을 씌웠고, 주변에 휘장까지 쳤으니 배에 탄 동안 왕의 눈에 들어온 바깥 풍경은 일절 없었다. 이번의 이배(移配)는 단단히 비밀에 붙여진 모양이라 생각하며 드디어 도착해 내린 곳, 말로만 들어왔던 그 제주라는 것이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혼자 읊조린 말이었는데 마중 나와 엎드려 있는 제주목사는 쓸데없는 대답을 뱉아낸다. “임금이 덕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구중궁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