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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백성 향한 ‘헌신’ 또는 출세 위한 ‘욕망’의 상징

(5) 화북·조천 비석거리
조선 후기 제주에 파견된
지방관들의 공덕·선정비
임금을 그리워 하던 정자
조천항 부근의 ‘연북정’

 

제주에는 비석거리란 지명이 꽤 여러 곳 있다. 저마다 사연과 연유가 담긴 비석들이 한두 개 이상씩 모아져 있다 보니 그렇게 불려온 듯하다.

화북 비석거리도 그들 중 하나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 비석 수가 특히 많다는 게 특징이다. ‘거리’라고 하기엔 짧은 수십 미터 울타리 안에 13개의 오래된 비석들이 가지런히 열 세워져 있다.

3개는 좀 더 우람하면서 머릿돌까지 올려진 상태이고 나머지 10개는 단순한 직사각형 비석들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은 탓에 일반인들이 비문만으로 개개 비석의 의미를 알기는 쉽지가 않다.

이곳 비석들은 1800년대 후반에 제주목에 파견됐던 목사(牧使) 아홉 등 열세 명 지방관들의 선정을 기리는 공덕비들이다.

어려운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휼민(恤民)’,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의미하는 ‘청덕(淸德)’, 사람이 떠나간 다음에 그리워한다는 ‘거사(去思)’ 등의 단어들이 지방관의 이름과 직책과 함께 비문에 포함되어 있다.

비석거리를 벗어나 화북포구와 군데군데 환해장성, 그리고 삼양 검은모래해변과 신촌을 거쳐 조천에 이르면 또 다른 비석거리에 이른다. 이 역시 올레길 노선상이고 18코스 종착지인 조천만세동산까지는 1.5㎞ 남겨둔 지점이다.

이곳 조천 비석거리는 ‘거리’라기보다는 광장에 가깝다. 제주 섬의 남쪽 반대편인 남원포구에서 중산간을 넘어 북쪽으로 곧장 달려온 지방도 1118번(남조로)을 포함하여 여섯 갈래의 길들이 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광장 한켠 건물 옆에 말끔하고 선명한 비석 9개가 서 있는데, 우리 세대에 만들어진 듯 역사적 의미는 별로 담겨 있지 않아 보인다. 그 맞은편이 중요하다. 커다란 폭낭(팽나무) 뒤로 13개의 비석들이 가지런히 줄 지어 서 있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구분이 어려우나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들 중 오른쪽 6개 말끔한 비석들은 일반인의 것들이고, 머릿돌이 씌워진 왼쪽 7개가 역사적 의미가 담긴 비석들이라고 한다.

이들 7개 비석의 비문 역시 화북 비석거리에서 보았던 것처럼 지방관의 이름과 직책 옆에 휼민(恤民), 청덕(淸德), 거사(去思) 등의 한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모두가 제주 백성들에게 청렴과 덕행으로 선정을 베풀었음을 과시하고 있다.

조천 비석거리에서 올레 18코스 노선을 따라 400m 나아가면 조천항이다. 조선시대 때 조천포로 불리던 조그마한 자연포구였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육지와의 개항지로서 방파제가 축조됐고, 이후 개발시대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지금이야 육지에서 오는 모든 선박들이 인근 제주항으로 모이지만 과거엔 이곳 조천포와 화북포가 육지로 나가고 들어오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이곳으로 들고나는 대부분은 조정에서 부임해 오거나 이임해 떠나는 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거나 사신들이었을 게다. 또는 유배객들도 배를 타고 내리며 들락거렸겠다.

포구 인근에는 이들이 하루 이틀 머무는 숙소인 조천관(朝天館)이 있었다. 풍랑이 거센 날이면 이곳에 머물며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오늘날의 제주야 여행자들의 천국이지만 백여 년 이전까지는 누구든 발을 들이고 싶지 않고, 왔더라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기에 날씨가 나빠 전날 떠나지 못한 이들은 다음날 아침(朝)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늘(天)을 쳐다보며 날씨를 살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조천’으로 불리게 됐다는 말도 있다.

‘조천(朝天)’의 사전적 의미는 ‘조정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것이다. 이곳 조천은 섬에 파견 온 지방관들이 하루속히 왕이 있는 한양으로의 복귀를 갈망했던 곳이기도 하다.

비석거리와 조천항 사이 올레 18코스 노선상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북쪽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자’인 것이다. 왕에 대한 충정의 마음보다는 관료적 욕망과 이기심이 엿보이는 지명이다.

양반 본인들로서는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었을 제주에서의 임기가 어서 빨리 끝나기만 바랐을 것이다. 이곳 높은 정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너머 북쪽을 바라보며 한양으로부터의 반가운 소식만을 기다렸을 그 시절의 관료들이나 유배객 선비들 모습이 연북정에서 그려진다.
 

 

제주를 거쳐 간 지방관들의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면, ‘청렴과 고결로 백성들에게 덕행과 선정을 베풀었음’을 내포하는 비석거리 비문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지 회의가 든다.

이 비석들이 주로 세워진 시기는 19세기 중후반이라고 한다. 조정의 통제력은 약해졌고 나라는 망해가던 조선 말기다. 지방 관리들의 착취와 수탈이 극에 달하며 제주에선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던 당시 역사를 떠올리면, 그 시절의 이런 공덕비나 선정비의 의도가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사가 발간한 ‘제주 역사 기행(이영권 저)’에서 조천 비석거리의 단면을 설명해주는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제주 여러 마을의 비석거리 중 특히 조천의 비석거리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제주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서 내려오는 관공리의 눈에 띌 확률이 그만큼 높다. 자신이 제주도를 떠난 후에라도 후임자나 암행어사에 의해 비석에 새겨진 자신의 선정(善政)이 조정에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는 곧바로 자신의 진급과 연결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기를 쓰고 선정비를 세우려고 했다.’

몇 페이지 뒤에 이어지는 화북 비석거리 설명글 또한 읽는 이의 고개를 저절로 끄덕여지게 한다.

‘조천 비석거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지방관의 선정비들이 세워져 있다. 제주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음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마치 좋은 목을 노리는 상인들처럼 지방관들도 다투어 이곳에 자기의 비석을 세워놓으려 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를 바로 코앞에 둔 시점의 지방관들이 무슨 선정(善政)은 그리도 많이 베풀었는지 궁금하다.’

이런저런 이면(裏面)을 모르고 지났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비석거리에 열 지어 서 있는 오래된 비석들 앞에서 우리 조상들의 덕행과 치적을 느끼며 여행자의 마음이 한결 따스해졌을 수도 있다.

바로 이어지는 연북정에선 멀리 떠나온 옛 관리들의 임금에 대한 충정의 마음을 느끼며 감동을 받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모름으로 해서 훈훈했을 여행자의 기분이, 우리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됨으로 해서 괜스레 씁쓸한 기분으로 마무리되지나 않을지….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