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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아군의 탈을 쓰고 쳐들어와…탐라인의 피로 물든 그날

(4) 제주에 온 장군, 최영·김통정
제주올레 16코스 다락쉼터
김통정·최영 장군의 석상과
‘항몽멸호의 땅’ 비석 자리
몽골 세력 척결 명분 내세워
일어난 삼별초·목호의 난에
주민 학살·강제노동 동원 등
변방 제주의 비극 숨어 있어

 

▲제주올레 16코스 시작점인 고내포구를 벗어나면 잠시 오르막 끝에 애월 해안도로변 시원한 언덕에 이른다. 서쪽 절벽 아래로 방금까지 지나온 해안선과 쪽빛 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다락쉼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여러 석상들과 정자와 벤치 등이 잘 배치된 공간이다.

다락쉼터 초입에 가지런히 놓인 벤치들 옆에는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란 문구가 적힌 대형 비석이 서 있다. 이곳 애월 지역이 ‘몽골에 맞서고 오랑캐를 없앤 땅’이란 뜻이겠고, 양쪽에 소박한 자태지만 호위무사인 듯 서 있는 두 명의 장군 석상이 이 비문을 뒷받침해준다.

비석 왼쪽은 ‘항파두리’ 안내석과 함께 김통정 장군의 석상이고, 오른쪽으론 ‘새별오름’ 안내석과 함께 최영 장군의 석상이다.

이곳에서 10㎞ 떨어진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애월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명소이기에, ‘몽골에 맞서’ 싸웠던 삼별초의 수장 김통정 장군이 왜 여기 서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연결이 된다. 그러나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새별오름’ 안내석과 함께 이곳에 서 있을 이유에 대해선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몽골과 결사항전을 준비했던 삼별초와 김통정 장군이 바다 건너 들이닥친 여몽연합군에게 단 며칠 만에 패하고 최후를 맞은 건 1273년 4월의 일이다.

이때 섬에 들어와 눌러앉은 몽골인들은 탐라를 그들의 전투마 공급을 위한 말 목장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탐라총관부를 두었고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삼게 된다.

고려의 일개 지방임을 뜻하는 ‘제주’라는 지명 대신에 원래 독립적이었던 옛 이름 ‘탐라’를 다시 씀으로서 자신들이 새로 쟁취한 새 지배자임을 은근히 과시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중국대륙에서 명나라가 흥하며 원나라가 쇠할 즈음 고려가 제주를 되찾기 위해 나서지만 100년 동안 탐라를 지배해온 몽골 세력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발한다. 소위 ‘목호(牧胡)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최영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토벌대를 제주로 보낸다. 1374년 고려군은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 포구로 상륙하여 중산간인 새별오름에서 목호군과 결전을 치른 뒤 결국은 서귀포 앞바다 범섬에서 목호 세력을 일망타진한다.

지금의 애월읍 권역인 새별오름에서 ‘오랑캐(胡)를 멸(滅)’하게 했으니, 다락쉼터 비석의 비문과 최영 장군의 석상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하는 이곳 쉼터에서 ‘항몽멸호의 땅’ 운운하는 엄숙한 비문을 대하는 게 어쩐지 불편할 이들도 있다. 몽골에 맞서다 죽은 김통정과 몽골 잔당을 척결한 최영, 두 인물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은 것이다.

제주 사람들 입장에선 석상으로 서 있는 두 인물은 항몽멸호 이전에 섬사람들에 대한 명백한 가해자들이다. 학교 교과서에는 중요 역사 인물로 나오지만 제주사람들로선 공경과 존경심이 우러날 만한 이유가 전혀 없기에 이곳 두 개의 석상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관(官)의 냄새가 짙은 것이다.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오면서 섬은 외지인들끼리의 전장터가 되어버렸다. 설문대할망이 섬을 빚고 고량부 삼씨가 섬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외지인들이 쳐들어와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인 최초의 사건이었다. 섬사람들은 당연히 원치 않는 상황이었고, 섬사람들과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싸움이었다.

삼별초 선발대가 맨 처음 탐라에 왔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군세였음에도 손쉽게 고려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건, 토착민들의 은근한 협조도 한몫했다. 제주인들은 고려 조정에서 파견돼 온 관료들에게 오랜 세월 수탈을 당하고 있었기에, 똑같은 외지인들이었지만 새로 나타난 삼별초 군들이 조금은 더 나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 본진이 들어오고부터는 상황이 바뀐다. 섬사람들은 새로운 소왕국의 왕을 섬겨야 하는 머슴이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해안선을 따라 적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인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아야 했고, 아무것도 없던 애월 항파두리에는 거대한 토성을 쌓아야 했다. 토성 내에 견고한 궁궐을 짓는 것도 모두 무력에 의해 강제 동원된 섬사람들의 몫이었다.

여몽연합군과의 한바탕 싸움으로 삼별초의 난은 진압되고 섬사람들은 해방되는 듯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려 조정과 몽골인들의 이중 지배에 시달리는 새로운 악몽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최영 장군은 제주 역사에서 또 다른 가해자였다. 삼별초 김통정 장군보다 더 무시무시한 상흔을 제주에 남겼다. 여몽연합군이 섬으로 와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떠난 후 어느덧 100년이 지나자, 이번엔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대규모 토벌대가 섬으로 들이닥친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최영 장군이다. 그가 이끄는 고려군 2만 5000여 명은 제주에 남아 있는 몽골 잔당인 1700명 목호들의 15배 군세였고, 당시 제주 섬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고려가 이런 대규모 토벌대를 꾸린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 세월 몽골인의 지배를 받아오며 제주는 친 몽골화가 되었고, 제주인들은 이미 고려의 백성이 아니라 오랑캐로 변했다는 게 고려 조정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몇 개월 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떠나자 제주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고, 섬 전체는 시체 썩는 냄새로 천지가 진동했다. 몽골인의 피가 섞인 가족들은 물론이고 몽골을 도왔거나 동조했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몽골인과 연루된 자들은 무조건 찾아내 현장에서 몰살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섬에는 100년 동안 주인 행세를 해온 원나라 몽골 대신에 고려인들이 새 지배자로 들어온다. 그리고 20년 후부턴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 이름만 바뀐 조정 관료들이 파견되어 섬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그들에게 변방의 제주 섬은 오로지 자신들의 사리와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섬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외지인들일 뿐이었다. 몽골인이건 고려인이건 조선인이건 다를 바 없는 ‘육지것들’이었던 셈이다.

조선 500년 동안 제주에는 특히 민란이 많았다. 한결같이 조정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가렴주구 때문이었다. 예전의 탐라국(國) 때처럼 자유롭고 편안했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섬 토착민들이 주인인 시절도 다시 오지 않았다.

‘목호의 난’ 이후 574년 뒤에는 제주 섬에 ‘4·3’이라는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탐라인들은 몽골에 동화된 ‘오랑캐 집단’일 뿐이라는 시각과 제주인들은 북조선에 동화된 ‘빨갱이 집단’이라는 중앙 정치인들의 그릇된 시각이 변방 제주의 비극을 불러왔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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