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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아름다운 시골길 사이로 울려 퍼지는 처연한 소리

(33) 서편제
서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버지·딸·아들로 살아온
소리꾼 가족의 인생 그려
배경인 청산도 황톳길은
서편제길로 불리며 유명세

 

한국영화의 역사는 ‘서편제’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60년대 최고 흥행작 ‘미워도 다시한번’ 30만 이래 고만고만하던 극장 관객 수는 1993년 ‘서편제’ 개봉 때 무려 100만을 넘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이 동력이 발판 되어 몇 년 후 ‘쉬리’가 단박에 6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우리영화 르네상스를 열었고, 2003년 ‘실미도’에 이르러선 급기야 1,000만 관객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의 코로나 시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탄생도 실은, 거장 임권택 감독이 30년 전 ‘서편제’를 통해 다져 놓은 토양 덕분일 것이다.

단성사 개봉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까지 청와대에서 관람했다며 연일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에도 내게는 어쩐지 ‘서편제’가 관심권 밖이었다. 판소리나 우리 전통 문화를 철없이 얕잡아 보며 시건방을 떨던 시절이기도 했고, ‘국뽕’ 장단에 난리법석이구나 하는 괜한 의심도 한몫 했다. 몇 년 후 비디오를 빌려와 집에서 뒤늦게 보았을 때의 놀람과 감동이 지금도 선명하다. 혈연은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가족이 된 세 식구의 슬픈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전개로 인해 쓸쓸하고 아련했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선 본 적 없었던 독특한 촬영 기법들이 두 시간 내내 몰입도를 높였다. 무엇보다도 영상과 어우러진 음악, 음악과 어우러진 영상이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의 영화 ‘미션’을 다시 보는 듯한 감동을 불러왔다. 엔딩 부분에서 남매가 만나 노래하고 장단 맞추는 ‘심청가’ 대목에선 화면 속 두 사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우리 가락 판소리에서 찐한 감동을 느꼈던 난생 처음의 경험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전라남도 보성 땅, 1970년대 초중반으로 짐작된다. 읍내와는 동떨어진 채 야트막한 산들로 첩첩 둘러싸인 고갯길 외딴 집으로 한 중년의 남자가 찾아든다. 표정으로 보아 굴곡진 인생을 살았음직하고, 눈빛에는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는 듯 깊은 사연이 엿보인다. 사람들은 이 고갯길을 소릿재라 부르고 이 집은 소릿재주막으로 불린다. 이곳에 소리꾼 아낙이 산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온 터였다. 임권택 감독의 93번째 작품인 ‘서편제’는 5부로 이어지는 이청준의 연작 단편 ‘남도사람’의 1부와 2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작가가 70년대 후반에 내놓은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영화 속 남주인공이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기도 했던 김명곤씨가 각색해 시나리오를 만든 것이다. 유봉(김명곤 분)-송화(오정해 분)-동호(김규철 분), 서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딸과 아들로 살아온 판소리 가족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룻밤 묵어간다며 소릿재주막에 들른 남자는 유봉의 의붓아들 동호다. 사춘기 때 집 나가 혼자 살다가 결혼을 하고부터는 옛 가족이 그리워져 뒤늦게 찾아 나선 것이고, 이 주막집에 한때 유봉과 송화 부녀가 살았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온 터였다. 저녁식사 후 소리꾼 아낙과 마주 앉은 동호, 아낙의 구성진 판소리와 함께 어릴 적 기억들이 아련하게 소환되고, 그 옛날 판소리 가족의 고달팠던 삶이 하나둘씩 회상으로 이어진다.
 

 

엄마 등에 업힌 어린 동호가 비 오는 날 유봉과 송화의 뒤를 따라 갯벌과 숲길을 지나는 장면부터, 영화 속에는 남루한 가족이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남도를 떠돌며 이 동네 저 동네 소리 품을 팔아 먹고사는 소리꾼 가족의 숙명이다. 영상 속 길 위의 풍광은 전형적인 로드무비에 걸맞게 너무나 아름답지만 인물들의 발걸음은 마냥 쓸쓸하고 처연하다. 예외인 경우가 청산도 황톳길 진도아리랑 대목이다. 시골 밭 사이로 꾸불꾸불 이어지는 돌담길을 걸으며 세 식구는 흥겹게 노래하고 덩실덩실 춤춘다. 한동안 밥벌이를 의존했던 약장수 부부에게서 쫒겨난 직후라 즐거울 기분이 전혀 아닐 상황이었건만, ‘사람이 살면은 몇백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로 시작되는 아버지 유봉의 선창에 송화와 동호 모두 저절로 흥이 나 장단 맞추는 것이다. 가족의 즐거운 한때를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들을 향해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5분 넘게 한 번에 찍은 이 롱테이크 장면은 우리 영화사에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힐 것이다.

그들이 걸어왔던 400m 돌담길은 30년이 지난 지금은 세상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서편제길’이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영화에선 농사 끝난 뒤라 온통 흙으로만 뒤덮였던 단색의 밭과 밭 정경이었지만 지금은, 계절에 따라 노란색 유채꽃과 청보리 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는 천연색 길로 꾸며진다. 세 식구의 춤사위 발자욱에 흙먼지 풀풀 날리던 그 황톳길도 말끔한 포장길로 바뀌어 있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고 하여 ‘슬로길’이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를 제주올레처럼 해안 따라 한 바퀴 빙 둘러 잇는 ‘슬로길’은 모두 11개 코스에 17개 길로 구성되어 있다. ‘서편제길’은 1코스를 구성하는 4개 길 중 3번 길이다. 완도항에서 뱃길 따라 50리인 청산도항에 내리면 남쪽으로 1.5km, 걸어서 20분 걸리는 위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남매의 재회 장면이다. “소릴 쫓아 남도 천지 안 돌아본 데가 없는 위인이오.” 장님이 되어 있는 누이 송화를 앞에 두고 동호가 아는 체 없이 노래를 청한다. “들을 만한 데도 없이 천하기만 한 소리요.” 이어지는 심청가 한 대목, 누이의 소리와 남동생의 장단이 어우러지며 서로의 한을 풀어내는 장면이 6분간 이어진다. 그 옛날 부친 유봉이 남매를 가르치며 갈구했던 득음의 경지, 한의 경지에 이른 소리와 장단이다. 노래 중반부터 송화가 흘리는 눈물로 보아, 그녀도 이미 앞에 앉은 이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남동생 동호임을 알아차린 듯하다. 김명곤과 오정해 두 배우와 여러 명창들의 판소리 외에도 가수 김수철이 작곡한 연주 음악 두 곡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한다. 심청가 후반부에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하는 대목부터 오바랩 되는 ‘천년학’은 이전 여러 장면에서 반복해 흐른 바 있고 영화 ‘서편제’를 대표하는 음악이다. 동호가 유봉을 박차고 떠날 때 흘렀던 아련한 멜로디의 ‘소리길’ 또한 헤어지는 남매의 애틋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장님인 송화가 눈 내리는 날 어린 소녀를 앞세워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빨간 옷을 입은 이 아이가 혹시 송화의 피붙이인지 궁금해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 씨가 출간한 대담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에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상관없다고 말한다.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한겨울 같은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