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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제주를 스쳐간 사람들...희미해진 삶을 되짚다

이영철의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이중섭
비운의 왕 광해의 귀양살이
박해 받은 천주교인 정난주
‘제주올레 인문여행’에 담아

 

▲올레길 속에 녹아든 제주의 역사와 문화

해외 여행길이 막히거나 부담스러운 코로나19 시대에 제주는 대체 여행지로서 더 부각되는 모양새다.

필자는 지면을 할애해 제주올레 26개 코스에 스며있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50개 이야기와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보고자 한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제주에서 인생을 보내면서 제주역사와 문화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많다.

올레 6코스는 서귀포시 쇠소깍다리를 출발해 서귀포시내를 통과, 이중섭거리를 거쳐 허니문하우스 전망대에 이르기까지 푸른 바다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이중섭 화백(1916~1956)은 6·25전쟁으로 1·4후퇴 때 원산에서 탈출, 부산을 거쳐 1951년 서귀포시 정방동 4.6㎡(1.4평) 쪽방에 정착했다. 부인과 아들 2명을 데리고 서귀포로 피난을 온 후 11개월 동안 머물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화백의 편지는 천재 화가 이전에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유배인 추사 김정희야 많이 알려졌지만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로 왔는지는 모르는 이들도 많다.

제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올레 20코스 구좌읍 행원포구는 광해군의 유배 모습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했던 이복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를 일으킨 패륜 군주로 낙인찍힌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을 실은 배는 어등포(구좌읍 행원포구)에 도착했다.

“이제, 제주도에 왔다”고 하자, 광해군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며 탄식했다. 제주에 온 유배인 중 왕족은 있었지만 왕은 광해군이 유일했다.

만인지상에서 죄인이 된 그는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음력 7월 1일 67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국의 왕으로는 쓸쓸한 최후였지만 4번째로 장수한 임금이었다. 이시방 제주목사는 시신이 썩을까봐 조정에 알리기도 전에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염을 해줬다.
 

 

아울러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는 36년을 제주에서 노비로 살았고, 그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묻혔다.

올레 11코스인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는 정난주 마리아(1773~1838) 묘가 있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난주는 남편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1801년 관노로 전락, 대정현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남편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 당하고, 두 살배기 아들(황경한)은 어린 나이를 감안, 죽음은 면했지만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됐다.

그녀는 제주로 유배를 가던 중 아들을 저고리에 싼 뒤 이름과 생일을 적어 추자도 예초리 황새바위에 두고 떠났다.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어부 오씨가 거둬들여 키웠지만 살아생전에 모자는 상봉하지 못했다.

정난주는 귀양살이에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고, 고결한 인품을 보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이처럼 올레길 곳곳에 이들에 얽힌 사연들이 스며있고, 삶과 죽음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섬을 빚은 설문대할망 설화와 탐라국 시조 고양부 삼씨의 신화는 물론, 삼별초와 목호의 난으로 이어지는 처참했던 역사, 무명천 할머니와 순이 삼촌으로 대변되는 4·3사건의 아픈 상흔들, 학교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이런 변방의 슬픈 역사들이 제주올레와 주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아름다운 경관에 가려지다 보니 무심코 지나는 이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경관 이면에는 제주인들의 치열한 삶이…

필자는 아름다운 경관에 가려진 이면의 이야기들, 무심코 지나는 이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 제주인들의 삶과 사연들을 들춰내 보여주기 위해 신간 ‘제주올레 인문여행’을 펴냈다.

각 코스에 스며있는 역사와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예를 들어 7코스를 보자. 관광지로서 가장 유명한 외돌개는 제쳐두고, 여행자들이 무심코 바라보며 지나가는 범섬을 주인공으로 다룬다. 650년 전 범섬을 무대로 펼쳐졌던 처참했던 제주 역사 ‘목호의 난’이 소환된 것이다. 탐라인들은 몽골에 동화된 오랑캐 집단이라는 고려 정부의 시각으로 섬 인구의 거의 절반이 희생된 사건이 ‘목호의 난’이다.

11코스 주변에선 유명 관광지가 된 대정 추사관을 소개하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은 추사 김정희가 아니다. 4·3사건의 주역 김달삼과 신축민란의 장두 이재수의 짧았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추사 유배지는 김달삼의 아내와 장인이 살았던 처갓집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유배인 대신 이들 비운의 제주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것이다. 추사관 바로 인근에 초라하게 서있는 대정 삼의사비와 이재수 생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저자는 김철신 문화관광 해설사의 인터뷰를 통해 표현했다.

“금년이 2021년 신축년입니다. 신축 민란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죠. 종교계 쪽에서야 당시 희생된 교인들을 추모하 는 행사가 여기저기서 많을 거예요. 하지만 이쪽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이 집에 살았던 20대 청년 이재수를 기리는 이들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제주인들을 대변하여 사심 없이 일어나 싸웠던 인물인데 말이죠. 120년 전 그 일이 그저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로만 치부되진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올레 걷기를 잠시 멈추고 유적을 방문해도 좋을 듯 싶다. 4코스에선 목호의 난 희생자인 한남리 고려 정씨의 열녀비, 14-1코스에선 영화 ‘지슬’로 많이 알려진 큰넓궤, 18코스에선 4·3 장두 이덕구의 회촌동 가족묘 등이 그런 곳들이다.
 



모두 화창한 제주의 이면에 가려진 아픈 역사의 상흔들이다. 3코스의 김영갑갤러리두모악과 6코스의 이중섭미술관에선 전시 작품들보다는 두 작가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했던 두 외지인이 제주에 살면서 느꼈을 여러 정서들이 관련 인사들 인터뷰를 통해 절절하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유명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올레길에 소환하기도 한다. 5코스에선 영화 ‘건축학개론’의 두 주인공을 통하여 올레길에서 느껴볼 수 있는 인생의 회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6코스에선 중국영화 ‘진용’ 속의 등장인물 서복을 불러내 정방폭포와 서복전시관을 소개하도록 만든다.

제주는 화산섬 특성상 지하로 스며든 빗물이 흙과 바위 틈새로 흐르다 저지대 해안 근처에서 용천수로 솟아난다. 오래 전부터 이 샘물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촌락을 이뤘다. 제주올레 425km 또한 저지대 해안에 근접하여 한 바퀴 이어지기에 올레길 주변의 이야기들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제주올레 인문여행’은 지금까지 외지인들이 써낸 수많은 제주여행서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듯 보인다. 고향이 한림읍 금능인 이 작가는 외지인 여행자들에게 제주의 겉모습보다는 속살을 봐 달라고 주문하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은 예술품 감상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겁니다. 여행지에 얽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들도 마찬가지라서, 아는 정도에 따라 여행의 깊이와 여행자의 상상력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지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아름다운 경관 이면에는 어떤 사연들이 숨어 있는지 등을 알아보려고 하는 건 여행지에 대한 애정의 발로입니다. 결과적으론 여행을 더욱더 풍요롭게 몰아가는 촉매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