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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탐라의 시간 보여주는 역사 문화 흔적들

(105) 탐라의 성주와 왕자
제주에는 오래전부터 성주·왕자 칭호 내려와…조선시대에 사라져
탐라, 당나라·일본 등과 교역할 정도로 조선술·항해술 뛰어나

 

▲월라악의 왕자묘와 이두어시봉

지난 호에 소개한 증보 탐라지(增補 耽羅誌)의 한 대목이다. ‘군산의 서쪽에 월라악이 있고 그 위에 왕자묘가 있다. 그 남쪽으로 이두어시봉이 있다(山之稍西月羅岳 上有王子墓 其南有泥頭於時峰…).’

월라봉에는 오래전 설촌됐다가 4·3으로 사라진 ‘이두어시’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지경 중 높은 곳을 이두어시봉이라 부른다.

위 글에는 월라봉 이두어시 마을의 한자어로 최근에 쓰이는 ‘그 이(伊)’가 아닌 ‘진흙 이(泥)’를 쓰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두어시’라는 지명은 월라봉에서 채취한 오색토와 관련해 형성된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위 고서에는 월라봉 정상 한 편에 왕자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자골이라 불리는 상예1동(3546번지 일대)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지금은 사라진 왕자묘는 원나라 왕자 둘이 탐라에 귀양 와서 묻힌 무덤이라고도 하고, 산남지역을 다스리던 탐라왕자의 무덤이라고도 전한다. 특히 후자는 한라산 산북을 성주가 다스리고, 산남 서부지역을 왕자가 다스렸다는 데서 기인하는데, 월라봉 인근 마을인 화순리에는 양왕자터라는 지명도 있다.

탐라순력도(1702) 고원방고(羔園訪古)는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종의 별장터라 전해지는 고둔과원(羔屯果園)에서의 왕자구지(王子舊地)를 탐방하는 그림이다. 고둔과원은 대정현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있는 현 용흥동 부근의 ‘염돈과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렇듯 제주에는 오래전부터 성주와 함께 왕자라는 호칭도 내려오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온 성주와 왕자는 조선을 거치며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으로 바뀌고, 세종대에는 이 직책들마저 사라졌다. 왕자 직은 고·양·부 삼성 외에 문가(文家)에서 여말선초 시기에 6대(1270~1402)에 걸쳐 이어갔는데, 월라악 왕자묘와 하원동 왕자묘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제강점기 전후를 거치며 도굴 등으로 사라진 월라악 왕자묘에 반해, 부장품 상당수가 도굴됐지만 3기의 무덤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하원동 왕자묘는 현장 안내판에 적시하고 있듯 문가에서 오래전부터 성묘하고 있다.

 

▲탐라의 성주와 왕자에 대하여

탐라(耽羅)는 신라(新羅)와 같은 나라의 의미이다. 반면 제주(濟州)는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경주·청주처럼 고을의 의미이다. 신라의 국명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란 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덕을 쌓는 일을 매일 새롭게 하면 그 영향으로 국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면 탐라·성주·왕자라는 명칭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전해지고 있을까. 나라는 한자 ‘羅羅’에서 비롯되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듯, 탐라는 백제와 신라와 조공관계의 나라, 즉 어엿한 왕국이었다. 다음은 18세기에 편찬된 증보탐라지 등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을나 15대손인 고후·고청·고계 3인이 배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 탐진(강진)을 거쳐 신라 서라벌에 갔다. 이때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나므로 태사가 아뢰기를, ‘이국인이 내조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도착하니)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장자는 성주(星主), 이자(二子)는 왕자(왕께서 둘째인 청을 아들처럼 대한 까닭), 막내 계자(季子)는 도내(度內)라 하였다. 읍호를 탐라라 하였는데, 신라로 올 때 처음에 탐진에 정박한 까닭이다.”

제주도에서 한반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뱃길 중 하나는 추자도를 거쳐 탐진에 이르는 바닷길이다. 탐진이란 지금의 탐진강이 흐르는 장성과 장흥 그리고 강진 일대의 지역이다. 이곳에는 본토와 왕래하는 탐라선인들을 대상으로 숙박업 등을 하는 탐라촌이 성시를 이뤘다고 전한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담은 탐라라는 국호는 탐진을 거쳐 신라를 왕래한 데서 비롯됐다고 여겨진다. 당시 탐라선인들은 덕판배를 타고 한반도는 물론 당나라·일본·유구 등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할 정도로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산북의 조천관포와 산남의 당포 등을 떠난 배는 추자도를 거처 본토와 중국 등지로 갔을 것이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과 축산물을 싣고. 해외에서는 쌀·소금·약재·비단·철재도구·도자기 등을 싣고 왔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문화를 간직한 곳이 월라봉 인근의 화순 선사유적지이고 용담동의 제사유적지이다.
 

 

추자도는 해상의 요충지였기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나날이 이주해 거주했다. 1374년 목호의난 때,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오는 길에 들렸던 곳도 추자도이다. 최영 장군이 제주에 오가면서 농사 및 어업 기술을 전수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추자사람들은 최영 장군의 사당을 지어 지금도 제를 올리고 있다.

 

▲제주의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에 대하여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으로, 1402년(태종 2년) 탐라에서는 시운이 불리함을 통감한 성주 고봉례와 왕자 문충세가 성주와 왕자 칭호가 참월(僭越)하고 월권한 듯해 이를 고치기를 조정에 청하니, 조정에서는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했다.

이후 좌·우도지관에 대한 예우가 계속돼 오다가 1445년(세종 27년) 소관호수(小官戶數)가 많다는 이유로 좌·우도지관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란 말처럼, 사실과 진실을 넘어 역사는 승자에 의해 미화되기도 한다. 지금은 성차별도 신분의 귀천도 없는 평등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도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로되, 후손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현대판 왕후장상은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실과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상 덕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조상들의 삶을 담은 역사문화를 알고자 하는 마음을 후손에게 심어주는 일은 설령 늦었다 하더라도 지금이 바로 적기일 것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