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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아름답고 희귀한 ‘오색토’ 묻혀 있는 신비의 땅

(106) 혹통밧·이두어시 마을
감산향토지 등 고문서에 기록
집 벽 채색·양회 대신해 사용
17세기 초 이두어시 마을 형성
4·3사건 후 잃어버린 마을 돼

 

제주민속학자인 고광민이 편저한 ‘제주 상창리 梁氏家 고문서(2018)’에 의하면, 1801년에 쓰인 고문서에 월라봉 동쪽에 있는 큰밭 지경이란 의미의 月羅岳東大田員(월라악동대전원)이란 한자가 등장한다.

또한, 위 고문서에는 월라봉에서의 농사와 관련된 글이 10여 차례 소개된다. 사진에서 보듯 여러 고문서 말미에 서명으로 손바닥 인장을 찍기도 했다.

월라봉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오색토라는 흙이 채취되었다는 점이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오색토를 채취하여 집 벽체나 바닥의 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감산향토지(2002)에는 ‘월라봉 동북쪽 300미터 지경에 위치한 월라봉 진입로 일대에는 넓은 밭이 있고 8가구가 살고 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곳이 앞에서 소개한 고문서에 기록된 月羅岳或洞員이다. 제주의 여러 마을에도 있었던 혹동원(或洞員)은 월라봉에 있던 통밧을 일컫는 말이다.

감산향토지에 실린 혹통밧에 대한 기록이다.

‘오색토를 채굴하던 굴 입구는 기어야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오색토층이 형성되어 보기에 휘황찬란하며 신비한 느낌을 준다. 과거 여유 있는 집에서는 양회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흙에는 광석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광산업자들이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다음은 월라봉 근처 마을인 상창리 김경윤(1932년생) 님의 증언이다.
 

 

‘혹통에 한 사람만이 줄을 타고 들어갔다. 줄에는 구덕 따위가 묶여 있었다. 혹통 속에 들어간 사람이 채취한 흙을 구덕에 담고, 줄을 흔들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줄을 당겨 흙을 모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덕은 바구니에 무명 헝겊을 대어 단단하게 만든 망탱이(망태기)를 지칭한다.

그곳에서 채취한 흙이 붉어서 월라봉 동북쪽 골짜기를 홍골이라 불렀다. 홍골 등지에서 채굴된 흙은 도배지가 없던 당시에는 집과 방을 채색하는 데 쓰였다. 이곳 사람들은 홍골에서 파낸 오색토를 주변 마을들을 다니며 팔기도 했다. 흙을 파낸 자리에는 60m 정도의 긴 굴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메워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이두어시에서 나고 자라며 오색토 채취 작업에도 직접 참여한 김유헌(1938년생, 현 안덕면 노인회장) 님의 안내로 통밧과 메워진 흙굴 지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이두어시

월라봉에는 설촌이 17세기로 추정되는 이두어시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두어시 마을의 설촌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18세기에 편찬된 증보 탐라지(增補 耽羅誌)에 실린 월라봉에 관한 글에서 설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일부를 다시 소개한다.

‘(군)산의 조금 서쪽에 월라악이 있고 그 남쪽으로 이두어시봉이 있다.(山之稍西月羅岳 其南有泥頭於時峰)’

위의 글에는 월라봉 이두어시 마을의 한자어로 ‘그 이(伊)’가 아닌 ‘진흙 이(泥)’를 쓰고 있다. 여러 문헌에는 이두어시를 한자로 伊斗於時, 伊頭於時, 泥頭於時로 쓰고 있다. 이곳 주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한다면, 증보 탐라지에 쓰여진 泥頭於時가 마을의 설촌 유래를 보다 적절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이두어시라는 지명은 월라봉에서 채취한 진흙인 오색토와 관련하여 설촌된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17세기 전후 이곳 지하에 희귀한 오색토(백·청·적·녹·갈색)가 또한 묻혀있음이 알려지니,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월라봉 한밭(큰밧) 근처에는 지금도 대나무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지경이 있다. 이곳 중심으로 김씨와 고씨 그리고 강씨 등이 모여 이두어시라는 마을을 이루며 25여 가구가 살았으나,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사라진 호산봉수에 관련된 특별한 증언

월라봉 서쪽에는 살레왓이라 불리는 동네도 있었고, 향군들이 바다를 지키려 흙을 쌓아 불을 피웠던 똥터라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몰똥터는 왜구들이 침범하면 향군들이 모아둔 말똥을 피워 신호를 보내던 곳이다. 월라봉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4·3 이후 지인들이 거주하는 인근 마을로 떠난 이후, 이두어시 마을은 1950년대에 폐동이 되었다. 이두어시 출신의 생존 인물로는 위에서 소개한 김유헌씨가 유일하다.

그 분은 이두어시망으로도 불린 호산봉수에 대하여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금의 박수기정 위에 있는 호산봉수보다 규모가 큰 또 하나의 봉수대가 이도어시 마을 서쪽에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를 거치며 밭 소유주인 전직 장관을 지낸 강 아무개 부친 등이 봉수대의 기단석 돌들을 주변의 밭담 등으로 옮겼다고 한다. 밭 주인이 봉수대 돌담들을 치워버리는 현장을 증언자는 직접 목격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증언으로 보아, 지금 박수기정 위 사유지에 흔적이 남아있는 호산봉수는 보조역할 등을 하고, 사라진 봉수대가 본 봉수대 기능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로는 사라진 봉수터에 서면, 동쪽의 군산과 범섬뿐만 아니라 서쪽의 산방산과 모슬봉, 그리고 멀리 고산의 수월봉과 당산봉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연대의 기능을 하기에 적합한 곳인 이곳에 호산봉수는 복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