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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200)일제 황민화 교육에 저항한 교육자…박애정신 실천

양치삼, 항일운동하다 징역…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
양치종, 제주도교육위 교육감 등 지내…국민훈장 모란장 등 수훈
양탕, 신라시대 열종 때 광순사…성씨 양(良)을 양(梁)으로 고쳐
양태교, 추자 등서 박애정신과 봉사 펼쳐…제자들이 추모비 건립
양한종, 남제주군 제4대 군수·적십자사 제주지사 사무국장 등 역임
양항국, 노형동 월랑촌 태생 훈장…효자 이계징 찬양 글 남아 있어

 

▲양치삼梁致三: 1911~1937(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양달하(梁達河)의 장남으로 한림읍 대림리(선-돌)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3일 학생 운동이 발생했고, 그는 3월 9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1년 8월 29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양치종梁致鍾: 1920(일제강점기)~2015. 제주도 교육감.

제주시 화북리(별도)에서 변호사 양홍기(梁洪基)와 김한옥(金漢玉)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주-성안’ 남문로 입구 ‘한질-골’로 옮겨 제주유치원에 다녔고 제주북교를 거쳐 1939년 휘문(徽文)중학교를 졸업했다.

만주(滿洲) 간도성 소재의 화룔현 공립 광제(光霽)욕국민우급학교 교유(敎諭)로 피명(被命), 1941년 도쿄문리학교 고등사범학과에 입학해 1944년 태평양전쟁으로 중퇴하고 1945년 6월 경성(京城)제국대학 이공학부 연구수(硏究手)로 임명됐다.

같은 해 광주사범학교 교유로, 1947년 목포 정명(貞明)여자중학교로 전입, 1949년 11월 1일 제주농업중학교 교사, 1950년 제주도 문교사회과 장학사, 제주농중 교감, 1951년 제주제일중학교 교장에 이어 성산수산고 교장, 조천중 교장, 1957년 제주제일고등학교 교장, 1962년 제주도 총무국 교육과장에 이어 제주도교육연구소 초대 전임소장, 1966년 제주제일고등학교 교장, 1972년 제주여자상업학교 교장, 1974년 제주시교육장, 1976년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장, 1980년 제주도교육위 교육감을 역임했고 1984년 만기 퇴임해 사단법인 현오(玄悟)학술문화재단 설립 인가를 받아 이사장에 취임했다.

1960년 녹조소성(綠條素星)훈장, 1971년 국민포장,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을 수훈했고, 4남 4녀를 뒀다. 대법관을 지낸 아들이 있다.

▲양탕良宕: 생몰년 미상. 신라 열종(烈宗) 때의 광순사(廣巡使).

그는 제주안무사 부계량(夫繼良)이 신라에 입조함에 작록(爵祿)을 줬고 또 의관(衣冠)을 줬는데 성씨 양(良)을 양(梁)으로 고친 것이 이때부터이다. 향토사가 김태능(金泰能)은 무열왕 때가 아닌가 추측했다.

향토사가 김석익(金錫翼)은 상고하길 관직 위호(位號)인 광순(廣巡) 안무(安撫)니 하는 관명이 당시 있을 리가 없으며 또 열종(烈宗)이란 임금은 없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아닌가 하나 무열왕 이전은 백제에 부용(附庸)한 사실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평했다.
 

 

 

▲양태교梁泰橋: 1907(융희1)~1943(일제강점기). 초등 교사.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교육에 저항한 교육자.

호 서홍(曙紅). 대정읍 상모리(웃-모실개) 양달수(梁達洙)의 3남이다.

그는 1932년 12월 22일 추자교회에서 목포 정명(貞明)여학교 교사 방필수(方必守)와 결혼했고 독실한 크리스찬인이다.

교장의 밀고로 시학관(視學官)이 찾아왔고 ‘가미다나’의 신주를 불태워 우상 숭배를 알아낸 당국은 1941년 1월 가장 오지인 안덕교 부설 동광(東廣)간이학교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그의 유시(遺詩) ‘팔도-자랑’은 부인인 교사 방필수와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1941년 5월 전도의 교사들을 한림교에 모아 교육자의 자세를 강조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자 동광간이학교 교사 서홍은 시학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국에서 내선일체를 강요하지만 먼저 일본인부터 이를 앞장서야 한다. 왜 일본인 교사에게는 한국인 교사보다 70% 이상의 봉급을 지급하는가! 또 일본인은 한반도와 일본을 자유자재로 출입하지만 한국인에 한해 도항증(渡港證)을 가져야 통과하게 하느냐! 이는 민족 차별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절규했다.

서홍은 1943년 7월 15일 파상풍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기독교인장(葬)으로 치러졌다.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왔으며 기독교인장으로 안장했다.

서홍은 1926년 4월 전남 장흥군의 시골학교 교사로 첫 출발, 1년 만에 추자교로 전보되자 또 하추자도의 부설 학교로 부임했다.

당시 초등학교는 4년제인데 신양리의 부설 학교는 1년생으로부터 4년생까지 70명이나 되는 아동을 한 학급에 수용해 가르친 것이다.

추자에서 9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오지에서 문명의 혜택을 못 받은 이들에게 기독교의 박애 정신과 봉사 활동을 펼쳤다. 주민이 병을 걸리면 투약과 주사를 놔주고 부녀자의 출산을 도와주고 밤에는 문맹 청년과 미취학 아녀자(兒女子)들을 모아 야학을 통해 글을 가르쳤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사표를 던졌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했던 서홍은 그만 쓰러져 이 정신을 이어받은 전남 나주 봉황鳳凰교의 제자들은 총동창회를 움직여 스승 양태교 훈도의 추모비 건립을 결의하고 아울러 환갑을 맞은 제자들은 대정읍 상모리(모실-개) 소재인 고인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참배했다.

추모비에 제자들이 얼을 모아 지은 ‘겨레의 등불’이라는 헌시(獻詩)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또다시 갱생하는 이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高麗族)// (‘겨레의 등불’)

이 유시는 조국의 해방된 후 동요곡에 맞춰서 전남지방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애송(愛誦)됐다.

▲양한종梁漢鍾: 1900~1979. 호는 송산(松山).

한경면 신창리에서 양원방(梁元邦·일명 원길元吉)의 첫 아들. 부인 채규애(蔡閨愛).

삼성시조사재단(三姓始祖祠財團) 제9대 대표이사(1944~1945), 남제주군 제4대 군수(1949~1950),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제2대 사무국장과 제주시행정자문위원을 역임(1950~1957)했다.

▲양항국(梁恒國): 생몰년 미상. 문사, 한문 훈장.

제주시 노형동(ᄆᆞ름) 월랑촌(月郞村)에서 태어나 일생 훈장으로 가르치며 살았다. 1873년(고종10)에 효자 이계징(李啓徵)을 찬양하는 글을 지어 당시 제주군수 김중배(金重培)에게 올렸다는 포양문(襃揚文)과 시 한 수가 과환록(科宦錄)에 보인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