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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고려 말 馬 두고 벌인 전투…도처가 처절한 전쟁터였다

(104) 목호의 난, 군산·월라봉 기원
공마 기르는 곳이라 해서 공ᄆᆞᆯ캐…ᄆᆞᆯ왓·ᄆᆞᆯ등어리왓 등 흔적
1374년 공민왕 재위 때 명나라 진상 거부하며 반란 일어나

 

▲말의 별인 천사방성(天駟房星)의 땅 탐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보유하고 다루는 능력이 곧 국력이던 시대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계 올림픽에서 인간이 동물과 함께 하는 유일한 경기가 승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과 관련된 별자리인 방성(房星)을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라 하여 제사를 지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성 동대문 밖에 설치된 마조단에서, 제주에서도 읍성 남문 밖 삼성혈 근처에 있는 KAL호텔 자리에 마조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방성은 하늘의 수레를 이끄는 네 필의 말이라 하여 천사(天駟)라 이르기도 하고, 방성과 천사를 합쳐 천사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의 수레를 끄는 네 필의 말을 상징하는 별인 천사방성이 비치는 제주는 예로부터 말들의 세상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조정에 바치는 말인 공마(貢馬)를 기르는 곳이라 하여 월라봉 일대를 공캐라 불렸다. 캐는 제주어로 들판 또는 목장지대를, 개는 포구를 의미한다.

안덕계곡과 남반내가 위치한 감산리에는 원의 탐라 통치 시 군마육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감산리에도 말과 관련한 지명들이 꽤 있는데, 공ᄆᆞᆯ캐를 비롯하여 말을 가두었던 밭에서 유래된 ᄆᆞᆯ왓, 말의 잔등과 닮은 밭이라 하여 ᄆᆞᆯ등어리왓, 말 머리를 닮은 지형이라 하여 ᄆᆞᆯ머릿도 등이 그것이다.

▲고려군과 목호의 전투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목호의 난은 고려 공민왕 재위 때인 1374년 일어났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제주 섬은 몽골족인 목호세력과 고려가 수차례 싸웠던 현장이다.

중국에서 원나라가 물러가고 이어 들어선 명나라는 ‘원이 통치했던 탐라는 명의 땅’이라 하며 고려조정에 제주마 2000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탐라목장을 관할하던 목호는 원이 기른 말을 명나라에게 바칠 수 없다며 300필만 내주었다.

명나라가 2000필을 재차 요구하자, 공민왕은 목호을 정벌하기 위한 출정군을 편성하여야 했다. 고려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 장군이었다. 이는 1388년 요동 정벌군 3만8830명과도 견줄 만한 최정예 전력이며, 당시 제주 인구와 맞먹는 병력이었다.

목호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 아막(阿幕)의 탐라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하였고, 탐라목장의 주도권은 사실상 서아막(한경면 고산 지경)의 목호가 장악했었다.
 

 

 

첫 전투에서 출정군은 명월포에서 목호군에게 대패하였다. 목호군의 전투력에 대한 두려움과 제주선인들 상당수가 목호군 편이었던 것도 패배의 원인이었다. 기병 3000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했던 목호군에는 당시 마을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결혼한 제주여인들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화 된 이들, 그리고 고려 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던 제주선인 등이 가세했다.

재차 벌어진 명월포 전투부터는 고려군이 승기를 잡았다. 이후의 전투는 목호군이 명월촌에서 새별오름 등지로 밀리면서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검은데기오름(애월읍 봉성리), 연래(군산과 월라봉 인근의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한 달여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목호군 수뇌부가 서귀포 법환리 앞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대피하자, 최영 장군은 배 40여 척을 몰고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출정군의 압박으로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범섬 전투 이후에도 동아막의 목호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계속 저항하자, 고려 출정군은 도망가는 무리를 전부 사살하였다. 목호의난 이후 탐라선인들은 고려 관리의 수탈과 행패로 여전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최영 장군의 목호세력 정벌 이후에도, 명은 탐라 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원 시대보다 더 많은 말을 바쳐야 했다. 1379년부터 1392년 고려 멸망까지 고려가 명에 바쳤던 말 3만여 필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마라고 전한다.

▲군산과 월라봉 원전

다음의 글은 18세기에 편찬된 증보 탐라지(增補 耽羅誌志:일본 천리대 소장, 김영길 번역본 706쪽)에 실린 군산과 월라봉에 관한 글이다.

“호산(蠔山): 현청에서 동쪽으로 25리에 있다. 일명 군산이라 하는데 혹은 굴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곧 창고천이 휘감아 흐르는 곳으로 예전에는 장장(獐場:노루 목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산의 남쪽 허리 아래로 물건을 넣는 농궤 같은 암석이 있는 데, 농동(籠洞:궤골)이라 한다. 또 곧은 바위가 우뚝 서서 마치 아이를 업은 것과 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름을 미륵동(彌勒洞:돌부처골)이라 한다. 또 다듬이나 디딜방아(방칫돌) 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름을 방하동(方何洞)이라 한다. 창고(倉庫)라는 이름이 이러해서(이것저것 볼게 많다 하여) 붙여졌다. 산의 조금 서쪽에 월라악이 있고 그 위에 왕자묘가 있다. 그 남쪽으로 이두어시봉이 있다. 또 남쪽 해변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위에는 소의 발자국이 드러나 있다.(蠔山 在縣東二十五里. 補. 一名軍山 惑稱窟山 卽倉庫川抱處 古有獐場 今廢. 山南腰下 巖石如積籠 名曰籠洞. 又直石特立 如負兒 名曰彌勒洞. 又有一石 如砧碓 名曰方何洞. 倉庫之名 良以此也. 山之稍西月羅岳 上有王子墓. 其南有泥頭於時峰.又有南海邊巖 上現有牛跡)”

위의 원문에서 보듯 호산이란 지명은 군산과 월라봉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한자로는 달리 쓰이고 있다. 즉 蠔山은 군산을, 壕山은 월라봉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최근 연구에는 월라봉과 군산은 80만 년 이전에 형성된 쌍둥이 화산체라고 한다. 최근 발간된 대한지질학회 학회지(57권 제2호)에 게재된 논문 ‘월라봉-군산, 제주도 최고기 쌍둥이 화산체의 지질과 화산활동’에 따르면 월라봉과 군산이 제주도 지표에 노출된 화산체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별개 화산체가 아니라 동시에 폭발한 하나의 화산체라고 한다.

1007년 제주에서 화산이 폭발하였는데, 지역에서는 이레가 지나 솟은 산이 군산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상서로운 산의 뜻을 가진 서산(瑞山)으로 불리다 산의 지형이 마치 군막과 같다 하여 군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군산은 북쪽에서 보면 군막을 친 형태이고 남쪽에서 보면 사자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군산 남쪽 마을에 예래(猊來)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했다 한다.

군산에는 아기업개돌 등이 있으며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태로 제주도에서 몇 안 되는 숫오름형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