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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왕과 왕비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고고유물 가운데 최고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지역에서는 이러한 금동관이 당시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에서, 그것도 왕릉이 아닌 분묘에서 그 출토예가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 요리 목곽묘,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목곽묘, 서산 부장리 분구묘, 익산 입점리 석실분, 고흥 길두리 석실분, 나주 신촌리 분구묘 등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백제지역에서 금동관이 출토되는 분묘 양상은 익산 입점리를 제외하면 중앙 지배세력의 묘제와 다른 다양한 유형의 분묘라는 점에서 각 지역별로 분묘 전통이 다른 토착세력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금동관이 출토된 분묘들은 한성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어서 당시의 백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한 변이 35×30m, 높이 5.5m의 방대형 분구묘로서 분구 내에 상·하 이중으로 12기의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부로 안치하고 있다. 그 중 을관(乙棺)에서는 한국 최초로 고대국가의 금동관이 부식되지 않고 거의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한편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전면 재발굴을 통해 분구의 축조기법을 살필 수 있었고, 분구 중에 열을 지어 돌려 세워놓았던 원통형 토기가 확인되었다.

 

 

신촌리 9호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25.5㎝로서 관모와 대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관모의 전체적인 형태는 2장의 금동판을 겹쳐 둥글게 감싸 덮은 후, 각각 4개의 원형머리를 가진 못으로 고정한 고깔 형태이다. 좌우 측판에는 연꽃과 넝쿨무늬, 그리고 파상문을 타출(打出)기법으로 전체적인 문양을 표현하였다. 금동대관은 둥근 테에 앞쪽과 양 측면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장식을 세운 형태이며, 영락과 유리구슬을 달았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금동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나주 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론이 분분한 편이다. 다만 이러한 금동관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과 공반되는 유물이 장식대도나 중국제 청자 등 위세품이란 점에서 백제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사여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에 비해서 금동관의 기본 형태나 문양수법에서 공통점이 많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신촌리 금동관을 중앙에서 하사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4〜5세기의 지방통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곧 담로제나 왕·후제(王·侯制)에서 작위를 받은 지방세력들이 금동관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마한 유적에서는 가야나 왜 등 대외교섭이 활발한 증거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금동관이 출토된 다른 지역에 비해 백제 중앙과 관계 속에서 좀 더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기고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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