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제주일보) 제주4.3 집단 수장(水葬) 학살…“진실 규명 언제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당시 인명피해를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서·어떻게·왜 희생됐는지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희생자들이 있다. 본지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추가 진상조사 등 4·3의 현안을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제주4·3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4일 제주경찰서 유치장과 주정공장에 수감된 예비검속자 500여 명이 바다에 수장(水葬)됐다는 증언이 수록됐다. 제주항 헌병대에 파견돼 경비로 근무했던 장모씨는 “이날 밤 9시쯤 50명씩 태운 차량 10대가 부두에 도착했고, 500여 명의 알몸인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에 나간 후 두 시간이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고 목격담을 밝혔다. 당시 해병대 군무관인 박모씨와 제주~목포 화물선 선장 김모씨도 주정공장에 수감된 상당한 수의 예비검속자를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증언했다. 이 외에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수감자 3명도 ‘2곳의 창고에 가득 차 있던 예비검속자들의 윗도리를 벗기고 포승을 채운 채 끌고 나갔다’는 목격담을 밝혔다. 정부의 보고서에서 ‘수장 학살’이 기록됐지만, 지금도 누가, 얼마나 희생됐는지는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이 조사를 했지만, 군·경 토벌대의 수감·처형 기록이 없는데다, 수장을 지시했거나 이를 이행한 당사자의 증언이나 양심 고백은 나오지 않아서다. 이로 인해 ‘야간에 화물선에 태운 양민들이 바다에 나간 후 빈 배로 왔다’는 증언과 수장된 시신이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쓰시마섬(대마도)으로 표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표류설’도 제기됐다. 더구나 1950년 가을, 어부들이 잡은 갈치가 상당히 컸는데, 그 이유를 수장된 시신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4·3당시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하산했던 많은 도민들이 주정공장 창고(임시 수용소)에 감금된 가운데,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백 명의 양민들이 제주 바다 어느 지점에서 수장됐고, 얼마나 학살됐는지 규명되지 않았다. 제주도는 2023년 ‘제주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을 개관, 4·3의 역사현장으로 보전하고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는 있지만, 수장 학살에 대한 실체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서나 수감·수형기록은 찾지 못했다. 이로 인해 1949년 3~5월 귀순한 양민 3000여 명을 주정공장 10여 개 창고에 분산 수용해 고문과 취조, 학살이 일어났지만, 이곳에 수감된 희생자에 대한 피해 보상과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승국 제주도교육청 평화교육인권위원장은 “4·3당시 수장에 대한 증언은 많지만 누가, 몇 명이나 희생됐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선장과 경비원, 생존 수감자의 목격담은 많지만, 시신이나 수감·처형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면서 당시 명령에 따랐던 이들의 진술이 있어야 수장 학살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제는 고구마를 발효한 주정(酒精)으로 항공기 연료인 이소부탄올을 생산하기 위해 1943년 주정공장을 설립했다. 군·경은 4·3당시 수용시설이 부족해지자 주정공장 10여 개 창고를 수용소로 이용했다. 이곳은 열악한 수용환경과 혹독한 고문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임신부도 수용돼 아기를 낳기도 했다. 1949년 5월 주정공장을 방문한 UN한국위원단은 남자는 물론 많은 여성들도 수감됐으며, 간난 아기와 어린이들도 있었다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