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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김양미 '비정상에 관하여'

 

 

열다섯 살 남자 아이가 다섯 살짜리 꼬맹이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집에서 버스로 일곱 정거장…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7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한 단어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장애, 장애, 장애…'


교실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사물함 앞에는 미친년처럼 머리가 헝클어진 나와 입에 게 거품을 물고 씩씩거리는 철구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대치 중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울거나 귀를 막고 교실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따분할 정도로 평화롭던 교실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것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사물함을 열겠다는 철구와 그걸 막아선 나와의 자존심 싸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미애 샘이 우리를 떼어놓으려 하자 철구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한테 일러줄 거야. 다 죽었어, 씨바아알!' 열다섯 살 남자 아이가 다섯 살짜리 꼬맹이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미애 샘이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별 일 아니에요'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내 옷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를 주워 바지 주머니에다 쑤셔 넣었다.

그 날 저녁, 식탁에 앉아 멍하게 밥숟갈만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물었다.

"학교에서 뭔 일 있었어?"

"일이야 뭐 맨날 있지."

"목에 난 상처는 또 뭐야. 애들하고 싸웠어?"

"내가 애냐. 애들하고 싸우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어딘가가 쓰리다 싶었는데 목 부분이 긁혔던 모양이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있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밥숟가락 들 힘도 없다. 남편이 연고를 가져와 발라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냥 대충해. 걔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용을 써.' 순간 울컥하며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걔들이 뭘 모르는데!"

"아니, 내 말은 그냥… 불쌍한 애들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뭐가 불쌍한데, 걔들이 어디가 어떻게 불쌍하냐고!"

더 말해봤자 싸움밖에 안 나겠다 싶었는지 약 상자를 들고 돌아서다 남편이 짧게 말했다. '많이 힘들면 전에 말한 거, 한번 생각해봐.' 남편은 지난달에도 저 말을 했다. '전에 말한 거'라고. 예전 같으면, '내가 정신병자야? 그딴 소리 한번만 더 해봐!' 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학교에서의 일도 그렇고,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다. 들이박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종종 나에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학교 앞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미애 샘이 불쑥 자기 언니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도 몇 번, 두 살 터울인 언니 이야기를 사적인 자리에서 한 적이 있었다. 우울증이 심해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 한다고. 그런데 얼마 전에 아는 분 소개로 다니던 병원을 옮긴 이후로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약 먹으면서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늘고,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운동한다고 아침 일찍 나가는 거예요. 며칠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오늘이 벌써 일주일째에요. 살도 좀 빠진 거 같고 얼굴도 밝아지고… 암튼, 한 시름 놨다니까요."

"새로 옮긴 병원이 잘하나 보죠?"

"그냥 작은 개인 병원이래요. 사람도 거의 없고, 언니는 그래서 더 좋대요."

내 친구 중에도 우울증이 심한 애가 있다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미애 샘은 핸드폰 사진에 저장해둔 의사의 명함을 내게 보내주며 말했다.

"근데 그 의사 샘이요, 이름이 진짜 재밌어요. 한번 들으면 절대 안 까먹을 걸요."

우리 아파트 위층엔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와 말티즈를 키우는 부부가 산다. 조금 전, 집을 나오다 개를 산책시키러 나가는 위층 남자를 만났다, 좁은 승강기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낑낑 대는 개에게 남자가 말했다. '얌전히 있어야지, 코코!' 문이 열리자 남자는 짧게 거머쥔 목줄을 잡아당겨 내가 먼저 내릴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예의 바른 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몇 년째 아래윗집으로 살고 있었지만 아이가 쿵쿵 뛰는 소리나 밤늦게 개 짖는 소리가 들린 적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조용하고 예의바른 가족이었다. 발걸음을 늦춰 남자가 개를 데리고 가는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걸었다. 짧게 목줄을 거머쥔 남자가 빵집 모퉁이를 돌아 공원 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버스가 왔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후 6시로 예약을 잡았다. 전화를 받은 남자가 '직장 다니는 분들을 위해 매주 화요일에는 8시까지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병원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재개발을 한다. 안 한다. 말이 많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동네에는 여기 저기 비어 있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전화로 알려준 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와 10분쯤 걸어 올라가니 1층에 편의점이 있는 낡은 회색 건물 하나가 나왔다. 그곳 4층에 '유두봉 정신건강 의원'이 있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데스크에서 건네준 간단한 질문지에 체크를 하고 10분쯤 지나자 진료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진한 카키색 와이셔츠에 흰색 넥타이를 매고 있는 50대 중반 가량의 남자, 서글서글한 인상에 입가에 세로로 난 깊은 주름이 괄호처럼 쳐져있었다. 진료실 양쪽 벽면으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는데 전공서적 외에도 소설책과 시집 같은 것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진료실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서재 같은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직업이 대안학교 교사라고 되어 있네요."

까만 슬리퍼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남자의 발이 책상 밑으로 보였다.

"이 일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5년 정도 됐어요, 정확히는 4년 8개월이고요."

"이런 일도 무슨 자격증 같은 걸 따야 하나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대안학교니까."

"그럼 대학에서는 무슨 전공을…."

"저는 철학과를 나왔습니다. 이 일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요."

"제 동생도 철학과를 나왔는데 지금은 정육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동생이 정육점을 하고 있든 치킨집을 하고 있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선생님, 사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요…."

긴장을 풀기 위해 허리를 쭉 펴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집에서 버스로 일곱 정거장이면 올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7년이었다.

"네, 말씀해 보세요, 편하게."

"그러니까 저에게… 문제가 좀 있는 거 같아서요. 어제 학생 하나랑 좀 다퉜는데, 아니 사실은 옷에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갈 정도로 몸싸움을 했어요. 그 친구가, 그러니까 철구가 사물함 문을 계속 열고 닫아요. 탁, 탁 소리 나게요. 철구는 강박과 불안증이 있거든요. 근데 저희 반에 지우라는 애가 있는데 그 소리를 못 참아요. 자폐증을 가진 친구라 소리에 엄청 예민해요. 애들 우는 소리랑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물건을 탁, 탁 여닫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미친 듯이 쿵 쿵 뛰어다녀요. 그러다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구요. 근데 그걸 보면 또, 예진이가 겁을 먹고 구석에 처박혀서 끝도 없이 울어요.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주 끝장을 보는 친구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사물함 문을 못 열게 막고 서 있다가…."

의사는 발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무릎 담요 같은 걸 발에다 확 갖다 씌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그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느끼실 수도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 다른 교사들은 저같이 행동하지 않아요. 규칙을 어기면 생각하는 방, 저희 학교에 그런 게 있어요. 화장실 두 칸 크기 정도 교실인데 거기 앉혀놓고 반성을 하게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싫거든요. 그게 뭐 크게 반성할 일인가 싶고. 철구가 사물함 문을 탁, 탁 소리 나게 여닫는 건 걔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다는 거라 평소엔 그냥 내버려 둬요. 지우가 좀 괴로워하긴 하지만 그럴 땐 화장실에 데려가 변기 위에 좀 앉혀 놓으면 되니까요. 지우가 거길 좋아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딴 교사들은 못 하게 하는 행동도 저는 다 이해가 돼요. 문제는 그러다 한 번씩 제가 펑 터져버린다는 거예요, 어제처럼."

"경우에 따라 분노 조절이 안 된다는 거네요?"

"네, 맞아요.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돼요. 그러다 몸싸움까지 가고. 한 번은 민정이라는 친구하고 머리채를 잡고 싸운 적도 있어요. 민정인 지적장애 2급에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까지 있어서 좀 골치 아픈 학생이거든요. 집에 불을 지른 적도 있고, 엄마 카드도 훔쳐 나가서 막 그어 쓰고 그래요.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민정이가 예진이 가슴을 만졌거든요. 얘들이 몸은 어른인데 이성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이성, 동성 구분 없이 막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고 그럴 때가 있어요. 이해 못할 일은 아닌 거죠. 근데 그 날은 민정이가 예진이 가슴을 만지며 징그럽게 웃는 거예요. 느글거리는 아저씨 표정, 딱 그거였어요. 그걸 보는데 저도 모르게 또…."

의사가 진료실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주며 말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오늘은 편하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세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병원을 나선 시간은 8시30분. 남편과의 갈등에서부터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까지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고해소의 문을 나서듯 진료실을 돌아 나오며 의사의 하얀 넥타이가 신부의 로만칼라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껏 미뤄뒀던 기나긴 참회록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간 느낌이었다.

두 번째 상담 날짜가 잡힌 날은 학교에 하루 휴가를 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해보니 의사는 진료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처음 병원에 간 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데스크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은 보이지 않았다. 김치가 담긴 사각 반찬통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의사가 캔 커피 두 개를 꺼냈다.

"식사 중이셨는데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나가서 먹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그냥 한 끼 때운 거죠 뭐."

"들어올 때 보니 아무도 없던데 다들 점심 먹으러 갔나 봐요."

"지난달까진 데스크를 봐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결혼한다고 그만 두는 바람에…."

"그럼 전에 왔을 때 본 그 친구는 누구죠? 고등학생 같아 보이던데."

"아, 태식인 제 아들입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가끔 나와 도와주기도 하죠."

첫 진료를 받으러 왔던 날, 데스크에 앉아 있던 남학생 모습이 생각났다. 살짝 반 곱슬머리에 두꺼운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쓰고 핸드폰을 보며 미친 듯이 낄낄 웃고 있었다.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범상치 않은 독특함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고."

"뭔가 정확한 원인을 알고 싶어서요."

"검사를 받아봐야 정확한 말씀을 드릴 수 있겠지만."

"대충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으로 오만 잡생각에 시달리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엉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런 걸로 봐서 조희성씨는 성인 ADHD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멍 때릴 때가 많고 뭔가 정리가 안 되는 타입이 주의력결핍 형이고 남들 보기에 소란스럽고 정신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 쪽이 과잉행동 쪽이라고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주의력결핍 우세 형이 아닐까 싶다고. 그 말에 나는 원인이 뭐냐고 물었다.

"뇌의 전두엽 쪽에 결함이 있는 건데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유전적인 경우도 더러 있고 임신 중에 산모가…."

"그럼 태어날 때부터 잘못된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거네요?"

"꼭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이게 유전일 수 있다, 엄마나 아빠 둘 중 누군가가 저한테 이런 DNA를 물려줬다 이 말씀이네요."

"할머니나 할아버지일 수도 있겠지요."

더 정확한 건 검사를 받아봐야 알 수 있다고 의사가 말했다.

세 번째 진료가 잡혀 있던 날, 학교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상담 날짜를 미뤘다. 듣고 나면 현실이 될 거 같아 두려웠다. 며칠 정도라도 내 불행을 유예해 두고 싶었다. 마치, AIDS 검사를 받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불안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뤄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틀 뒤로 다시 진료 날짜를 바꿔 병원을 찾아갔다. 핼쑥한 얼굴로 나타난 나에게 의사는 밝은 표정으로 '양성' 판정을 내렸다.

"검사결과 조희성씨는 ADHD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주의력 결핍 우세형'입니다."

내 뱃속을 열어 암 덩이를 꺼내 보여주며 '자, 이게 암입니다. 보셨지요.'라는 말을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막연하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 동찬이와 철구처럼 복합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는 치질이나 무좀처럼 흔히 따라 붙는 병명이었다. 예전에 동찬이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일로 겪어보기 전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고. 오히려 무심한 사람들이 더 고마울 때가 있다고 말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다 이해해요'라는 말을 동정어린 눈빛으로 전할 때 더 비참하고 더러운 기분이 든다고. 저 의사는 내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다. 어쨌거나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담담함이 참담함으로 바뀌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나에게 '웩슬러 지능 검사지'인가 뭔가를 꺼내놓고 하나하나 콕콕 짚어주며 말했다.

"학습능력을 보면 주의집중, 지각 조직, 언어이해, 처리속도 이렇게 4가지 영역이 나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네 가지 지표가 거진 비슷해요. 근데 여기 보시면 조희성씨는 아주 극과 극이에요. 언어나 추론 면에서는 점수가 높은 편이지만 작업 기억이나 처리 속도는 아예 바닥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뛰어나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뒤처진단 말인 거죠. 예를 들면, 시력이 오른 쪽 눈은 아주 좋은데 왼 쪽 눈은 아예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안 좋은 쪽 시력을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희성씨가 가진 재능 중에 아주 뛰어난 게 있다 하더라도 현저하게 떨어지는 작업 기억이나 처리 속도 이런 게 발목을 잡는다는 말입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이나 과학 때문에 평균 다 깎아 먹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런 경우, 경계선 지능 장애를 의심해 보기도 하는데 조희성씨 같은 경우는, 여기 자율신경계 검사를 보시면…."

의사가 계속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다른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한 단어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장애, 장애, 장애…' 장애가 있는 학생들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들과 나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그리 영특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자란다' 소리를 듣지도 않았다. 글도 남들보다 빨리 깨우쳤고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수도권-정확히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4년제 대학도 졸업했다. 그런데 내가 경계선 지능 장애 수준이라니,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 한참을 뭐라고 혼자 떠들던 의사가 검사지 묶음을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용케 잘 살아 오셨네요. 하하하."

남편은 위아래, 그리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내왔고 평범한 가정에서 무난한 성격의 시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에 비해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간이었다. 대학 다닐 때도 휴학을 두 번이나 하는 바람에 6년 만에 졸업을 했다. 친구들은 방학 때 토익 학원이나 컴퓨터 자격증을 따러 다녔지만 나는 절에 들어가 한 달씩 처박혀 있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친구와 함께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꼬질꼬질 해 보이는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여자에게 '여기 보단 길 건너 피자집이 훨씬 더 싸고 맛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우연히 그 소리를 듣게 된 피자집 사장은 그날로 나를 쫓아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는, '그래 너 잘났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니'라며 따져 물었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나,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어?"

"그냥 좀 독특했지."

"어떤 점이?"

"맨날 땅만 보고 다녔잖아. 부끄럼 엄청 타는 애처럼. 근데 또 어쩔 때 보면 뻔뻔하기 그지없고.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데 좋은 건 또 너무 열심히 하고. 암튼 극과 극이었어."

오늘만 해도 저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극과 극.

"얼마 전에 영철 선배 만났을 때 그 이야기 하더라.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동아리 방에서 낮술 마시다가 선배가 그런 말 한 적 있었잖아. 시내버스만 계속 갈아타고 땅끝 마을까지 갈 수 있겠냐고. 그때 너가 술 마시다 벌떡 일어나더니 뭐라 그랬는지 기억나?"

"당장 가보자."

"그 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영철 선배랑 나랑 결국 해남까지 끌려갔잖아.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짓이냐."

"그게 뭐 별 거라고. 다들 재밌어 했으면서…."

"한 두 개가 아니니까 문제지. 2학년 땐가, 엠티 갔다가 산에서 라면 끓여 먹은 적 있었잖아. 그때 나무에서 무슨 벌레 같은 게 냄비 속에 뚝 떨어져가지고…."

그때 다른 여자애들은 소리를 지르며 라면엔 손도 대지 않았다.

→ 24면에 계속([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김양미 '비정상에 관하여'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