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본지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역대 기록물과 활용 사례를 살펴보고, 제주4·3기록물이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나기 위한 향후 과제를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광주 동구 금남로에 있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경. [5·18기록관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6774950791_5ee355.jpg)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광주시민들이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 저항한 의로운 항쟁이다.
신군부가 동원한 계엄군에 의해 광주 전역이 고립됐지만, 시민들은 하나가 돼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를 위해 기꺼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광주는 치안 공백이 됐지만, 약탈이나 매점매석은 없었으며 시민 스스로 질서를 지키면서 평화적 자치공동체를 실현했다.
5·18은 진상규명과 청문회를 통해 ‘사태’와 ‘폭동’이 아닌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시민 항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고, 5·18정신의 세계화를 위한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이 이어졌다.
그 결과, 2011년 5월 25일 5·18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5·18은 누구도 은폐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 됐다.
5·18은 그동안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 5대 원칙 아래 우리나라 민주화는 물론 필리핀·태국·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줬고, 과거청산의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층 상설전시관에 마련된 ‘항쟁’ 전시물. [5·18기록관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6774953678_b46c9f.jpg)
광주 동구 금남로 옛 광주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한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은 2015년 5월 문을 열었다.
5·18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264억원이 투입돼 지상 7층·지하 1층 규모로 건립됐다.
기록관에는 5·18 당시 공문서, 시민군 일기장, 재판기록, 정부기관과 군 사법기관의 자료, 기자들의 취재수첩과 일기, 사진, 피해자들의 병원진료 기록 등 4271권에 86만쪽, 사진은 1733장, 필름 3700컷에 달하는 등재 기록물을 전시·보존하고 있다.
1층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광주의 관광지를 안내하는 방문자센터로, 지하는 카페 등 시민공간으로 조성했다.
지상1층부터 3층까지는 ‘항쟁’, ‘기록’, ‘유산’을 주제로 상설전시관이 마련됐다. 각종 정보와 문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쇼케이스와 정보검색시스템(키오스크)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방송물과 영상,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영상실이 설치됐다.
4층은 민주인권과 5·18을 소재로 한 자료, 교양도서 등 1만여 점을 비치한 작은 도서관이 들어섰다.
5층은 세계기록유산과 원본 기록물을 보존한 수장고, 6~7층은 사무실과 스튜디오, 다목적강당, 세미나실을 갖췄다.
광주시는 5·18기록관 수장고의 만고율이 95%에 달하면서 433억원(국비 151억원·시비 282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6300㎡ 규모의 신축 수장고 건립을 추진 중이다.
신수연 5·18기록관 기록연구사는 “5·18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위해 필요한 것을 자료”라며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많은 기록들은 소실되고 날조됐다”며 초기 자료 수집에 어려움을 털어놨다.
이에 따라 광주5·18사료편찬위는 ‘5·18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기획해 1997~2014년까지 총서 61권을 종이책과 전자파일로 발간했다.
총서 6~10권은 주한미국대사관과 미국 국무성이 주고받았던 비밀전문이다., 특히 ‘체로키 파일’로 불리는 비밀전문은 1979~1980년 미국정부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다.
체로키는 백인이 학살한 미원주민 부족으로, 그 이름을 딴 ‘체로키 파일’는 1996년 미국의 팀 셔록 기자에 의해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광주시는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밀 해제된 자료를 요구했고,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조건으로 자료를 무상으로 받았다. 이 중 일부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신수연 연구사는 “2011년 5·18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민주화운동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정립됐지만, 주요 쟁점인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의 책임자 규명, 행방불명 암매장에 대한 의문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며 “여전히 밝혀내지 못한 역사, 숨어버린 기록을 찾는 이유가 아직 남아있다”고 밝혔다.
![2층 상설전시관에 마련된 ‘기록’ 전시물. [5·18기록관 제공]](http://www.lpk.kr/data/photos/20250416/art_17446774955622_50d8dc.jpg)
“잠든 자료가 아닌 다양한 콘텐츠로 활용해야”
■ 김호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인터뷰
“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기록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통로이자 미래의 창입니다.”
김호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은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5·18이 기록유산이 된 이유는 인류가 기억해야 할 인간의 존엄과 자유·평등의 정신을 평범한 시민들이 실현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 관장은 지난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오월일기’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김현경 일기 공개 전시회를 연 이유에 대해 “기록물은 과거의 자료가 아니라 이 시대의 가치로 되살려내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어 “잠들어 있는 자료를 스토리와 콘텐츠로 만들면 전 세계인에게 5·18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며 “콘텐츠를 잘 활용하면 드라마나 소설이 될 수 있으며, 5·18에 관심이 적은 젊은이들도 역사의 진실에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5·18기록관은 국내·외에 산재한 방대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통합 데이터베이스와 AI 아카이빙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는데, 세계 시민 누구나 기록물을 손쉽게 찾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5·18의 가치는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5·18기록물을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과 공유해 광주가 민주인권평화도시로 나가는데 노력하겠다”고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