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대왕 시대 압록강·두만강 유역서 여진족 몰아내고 ‘4군 6진' 개척 수양대군 계유 쿠데타에 함길도 이징옥의 난…단종 복권 목적으로 했던 듯 세조의 중앙집권·호패법 강화에 함길도 주민들 불만 커지자 ‘이시애의 난' 1392년 조선 건국 후 압록강, 두만강 유역 북방영토 개척이 진척됐다. 1395년(태조 4년) 여진 건주위 오도리부 족장 몽케테무르(童猛哥帖木兒)가 한양을 방문, 태조 이성계를 배알(拜謁)했다. 17세기 초 후금(後·淸)을 세우는 아이신고로 누르하치는 몽케테무르의 후손이다. 1398년 조선 정권 2인자 정도전은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 자격으로 함길도 일대를 순찰하고 △안변 이북에서 북청 이남까지를 영흥도 △단천 이북에서 경흥 이남까지를 길주도라고 명명(命名)했다. 조선은 두만강변 공주(孔州)에 도호부를 설치해 경원도호부라 하고, 경원도호부를 함길도 경략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조선은 1401년(태종 3년)에 서북면강계만호부를 강계부로 승격시켰다. 1422년(세종 4년)에는 최윤덕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경 군사기지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동북면(함경도)과 서북면(평안도) 모든 지역을 정식 행정조직에 분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4
광천선굴(廣川仙窟)로 알려진 지역 명소 길이 약 600m·지질연대는 4억년 내외 허목·이익상·이세구·채팽윤 동굴 찾아 큰 횃불 의지해 어둠 속으로 탐험 떠나 기괴한 바위 구불구불 깊고 그윽한 광경 직접 답사한 체험기 비롯 시문으로 남겨 평창군 대화에서 대화천을 건너면 땀띠물이 기다린다. 예전부터 물로 몸을 씻으면 땀띠가 깨끗이 나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가뭄이 심해도 수량이 일정하고, 수온은 항상 10도를 유지한다. 여름철엔 손발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겨울철엔 따뜻하여 동네 빨래터로 유명했다. 수질도 좋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최근 땀띠공원으로 탈바꿈해 휴식 장소가 됐고, 이곳에서 매년 평창더위사냥축제가 7월 말부터 8월 초에 열린다. 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는 동굴 탐험이다. 광천선굴(廣川仙窟)로 알려진 굴의 길이는 600m 정도, 지질연대는 약 4억년 내외, 동굴 안의 온도는 늘 14도 정도다. 동굴은 예전부터 대화지역의 명소였다. 조선시대 허목(許穆·1595~1682년)은 이곳을 직접 답사하고 ‘척주지'에 남긴다. 대화역 북쪽에서 석굴을 구경했다. 큰 횃불을 앞뒤에서 연이어 들고 속으로 들어가는데 험준한 구멍이 사방으로 통하여 막힌 데가 없다.
명군이 수도 진격해오는 상황에서도 권력투쟁 이어가던 원나라 순제 도망하다 병사하고 황태자는 외몽골로 도피 후 황제 등극 고려 공민왕 명나라 난징에 사신 보내는 등 대륙정세 변화 관찰 이성계 등 앞세워 파저강 일대 차지…랴오양까지 점령했다 후퇴 평지전·산악전·수전 모두 능했던 ‘이성계軍' 여타 고려군단 압도 랴오둥 공격 나선 이성계 회군 우왕 등 숙청…4년 뒤 조선 건국 중국 저장성 동부를 뜻하는 ‘절동(浙東)'의 소금상인 방국진이 1348년 반원(反元) 봉기를 일으켰다. 한족국가 남송(南宋)이 멸망한지 69년 만이었다. 1353년 곽자흥과 서수휘 등이 이끄는 백련교도 반군과 장사성이 이끄는 농민반군이 허난, 안휘, 저장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재상(宰相)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 등의 한족 반군에 연전연승했다. 고려 공민왕은 1354년 7월 급변하는 중원 정세를 파악하고자 류탁, 정세운, 이방실, 안우, 최영(崔瑩), 김용 등에게 2,500여 정예 병력을 주어 토크토아를 지원, 장쑤성 고우(高郵)에 진치고 있던 장사성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현지 고려인까지 가담, 고려군은 2만3,000명으로 늘어났다. 승전을 거듭하던 토크토
명군이 수도 진격해오는 상황에서도 권력투쟁 이어가던 원나라 순제 도망하다 병사하고 황태자는 외몽골로 도피 후 황제 등극 고려 공민왕 명나라 난징에 사신 보내는 등 대륙정세 변화 관찰 이성계 등 앞세워 파저강 일대 차지…랴오양까지 점령했다 후퇴 평지전·산악전·수전 모두 능했던 ‘이성계軍' 여타 고려군단 압도 랴오둥 공격 나선 이성계 회군 우왕 등 숙청…4년 뒤 조선 건국 중국 저장성 동부를 뜻하는 ‘절동(浙東)'의 소금상인 방국진이 1348년 반원(反元) 봉기를 일으켰다. 한족국가 남송(南宋)이 멸망한지 69년 만이었다. 1353년 곽자흥과 서수휘 등이 이끄는 백련교도 반군과 장사성이 이끄는 농민반군이 허난, 안휘, 저장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재상(宰相)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 등의 한족 반군에 연전연승했다. 고려 공민왕은 1354년 7월 급변하는 중원 정세를 파악하고자 류탁, 정세운, 이방실, 안우, 최영(崔瑩), 김용 등에게 2,500여 정예 병력을 주어 토크토아를 지원, 장쑤성 고우(高郵)에 진치고 있던 장사성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현지 고려인까지 가담, 고려군은 2만3,000명으로 늘어났다. 승전을 거듭하던 토크토
강릉대도호부 부사 양수 떠나보내며 벼랑에 몸 던진 청심의 이야기 전해져 1788년 금강산 가던 단원도 화폭 담아 오대천가에 우뚝 선 바위 백척 되는듯 뾰족한 바위 기이하고 소나무는 늠름 1788년 정조대왕이 김홍도를 불렀다. 금강산을 그려 오라는 명을 받은 김홍도는 그림 여행길에 올랐다. 영월 주천에서 청허루를 그렸다. 평창 대화를 지나 모노령(모릿재)을 넘은 후 청심대(淸心臺) 앞 하천을 건너서 화첩을 꺼냈다. 대부분 시와 여행기에 묘사된 청심대는 김홍도가 섰던 곳이 아닌 청심대 뒤로 난 오솔길에서 본 모습이었다. 오대천 가에 우뚝 선 바위가 백 척 이상 되는 듯했다. 뾰족한 바위도 기이하지만 바위틈에 늠름하게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밑에 흐르는 오대천과 모노령으로 향하는 오솔길도 그렸다. 길 위에 선 여행객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청심대와 관련된 청심(淸心)의 이야기는 심언광(沈彦光·1487~1540년)의 시에 등장할 정도니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있던 양수(梁需)가 한양으로 돌아갈 무렵인 1418년부터 이야기가 전해져 왔을 것이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병조 참의로 있던
오고타이칸 몽골 사신의 피살 핑계로 1231년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격 명령 살레타이는 용인 처인성 전투서 사살 무신정권 중심으로 이어진 대몽항쟁 1270년 11월 몽골에 항복 원제국 복속 항거의 역사 덕에 고려 정체성은 지켜 공민왕 홍건군 침공에 안동까지 몽진 20만 의용병 분전으로 겨우 개경 탈환 원나라 군벌 이성계도 참전 큰 공 세워 한족이 이민족 침략에 위축됐을 시절 보수·폐쇄적 철학체계 성리학 나타나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통치이념 삼아 # 거란족에 몽골 방어하게 한 ‘금' 시베리아의 삼림민족 투르크(터키)계 키르키즈족(Kyrgyz)이 9세기 몽골고원으로 남하했다. 키르키즈족에게 패한 위구르와 카를룩 등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은 대부분 몽골고원을 떠나 신장(新彊) 포함 서역으로 이주했다. 키르키즈족도 몽골고원에 정착하지 못하고 원주지로 되돌아갔다. 투르크계가 서천(西遷)한 후 북만주의 실위몽올(室韋蒙兀)이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몽골고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몽골제국을 세우는 칭기즈칸(테무친)은 동북몽골 오논강 유역 몽골부 보르지긴씨족 출신이다. 칭기즈칸의 외가, 처가 모두 내몽골 후룬베이얼(Hulunbuir) 초원을 근거로 한 투르크계 옹기라트부다.
18세기 초반 김창흡 시문 지으며 노년 유유자적 1778년 단원 김홍도 직접 찾아 절경 화폭에 담아 주변 노송 지금도 늠름…경포호는 매립 사라져 66세 노인은 인제에서 출발해 미시령을 넘었다. 바다를 따라 내려오는데 경포호가 발길을 잡는다. 특히 호해정(湖海亭)이 마음에 들었다. 노년을 보낼 만했다. 1718년에 아들 양겸(養謙)에게 편지를 쓴다. “경포호 가운데 있는 조도(鳥島), 경포호의 안개와 연기가 만나는 경치는 더욱 기이하구나! 거기다가 사람들이 머물기를 권하니, 정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없구나.” 노인은 호해정에 머물면서 학문과 시문을 강론했다. 틈틈이 경포호에 배를 띄우고 흥에 겨우면 시를 읊었다. ‘호정잡음(湖亭雜吟)'에 지금은 사라진 호해정 앞 경포호가 넘실거린다. 옛날 홍장이 머문 이 호수(紅粧舊臨水)/ 바위엔 아직 풍류 남았네(片石尙風流)/ 늙은이 온갖 상념 사라져(夫灰萬念)/ 흥겨움 없어도 배에 머무네(無興駐扁舟). 세속적 욕망이 사라진 노인의 편안한 얼굴이 보인다. 시비를 잊고 망연히 배에 앉은 모습도 보인다.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넘은 듯 무심(無心)하다. 그렇게 한동안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은 호해정에서 유유자적했다
토번·후돌궐 대두로 당 영향력 약화 대조영 부자 등 이끈 전고려 유민세력 698년 투먼 동모산 일대 중심으로 건국 일본과 외교과정 스스로 ‘고려'라 칭해 아무르강 상류 실카강 유역까지 진출 유적서 위구르 토기·경교 십자가 발견 초원의 길 따라 중앙亞·중동과도 교류 唐·日 무역도 활성화 경제 발전 도모 예맥(고구려·부여)·말갈계뿐 아니라 거란계 비롯 소그드(이란)계도 거주 10대 ‘선제' 재위기에 최전성기 맞아 840년경 이후 한반도 북부 통제력 상실 # 당 추격군 격파하고 국가 재건 전고려(고구려) 멸망 불과 2년 뒤인 670년 7월 설인귀의 당군(唐軍) 10여만이 티베트 고원에서 굴기(?起)한 토번제국(618~842년) 대군과의 칭하이(靑海) 다페이촨(大非川) 전투에서 대패했다. 토번은 그 직전인 669년 당나라에 속한 서역(신장) 안서 4진을 점령했다. 토번 전선 상황이 급박해지자 랴오둥의 당군은 671년 7월 전고려 부흥군의 보루 안시성을 점령한 후 토번 전선으로 이동해 갔다. 당나라 축출 전쟁에 돌입했던 신라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당나라는 678년 토번과
◇국방부 △강원도 국방협력관(파견) 김영대 ◇기상청 △강원기상청 관측과장 박정수 △춘천기상대장 문재인 ◇신한은행 ▼승진·이동 △양양지점장 김진만(원주금융센터 부지점장) ▼승진 △원주중앙점 부지점장 심순희 △정선사북지점 부지점장 김윤수 △홍천지점 과장 김현희 △춘천남지점 과장 오정현 ◇대한석탄공사 ▼본부장 △안전기술본부장 직무대행 권태중 ▼1급 승진·전보 △경영지원실장 김정호 △감사실장 이동길 △연구소장 신영윤 ▼2급 승진·전보 △기획조정실 예산팀 부장 홍명기 △경영지원실 상생협력팀 부장 전도준 △화순광업소 기획부장 손성원 △〃 공무부장 김희중 ▼2급 전보 △경영지원실 경영관리팀장 최종민 △〃 상생협력팀장 최광진 △〃 노사협력팀장 김태욱 △안전생산실 안전외주팀장 민동기 △기술지원팀장 윤형근 △감사실 감사팀장 주철응 △장성광업소 공무부장 김영호 △〃 품질관리부장 전규표 △화순광업소 동생산부 부장 이동현 △연구소 남북협력팀장 함돈환 [인사]강원대학교 2021년 7월 1일 *강원대학교 인사발령사항 - 첨부파일 참조
섬 전체에 대나무 가득 '죽도'라 불려 해안가 내려가면 기기묘묘 바위 압도 옛 양양부사 '신선이 사는 곳' 극찬도 고려 말인 1349년, 이곡(李穀·1298∼1351년)은 8월14일부터 9월21일까지 38일간 동해안을 유람하고 '동유기(東遊記)'를 남긴다. 비 때문에 양양에서 이틀을 머물고 강릉에 도착하기 전에 중간에서 이틀을 묵는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유숙하였는데, 그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묵었다.” 관란정은 어디에 있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관란정을 '동산현(洞山縣) 동쪽 2리에 있다'고 알려준다. '죽도(竹島)'를 함께 설명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부 남쪽 45리 관란정 앞에 있으며, 푸른 대나무가 온 섬에 가득하다. 섬 밑 바닷가에 구유같이 오목한 돌이 있는데 닳고 갈려서 교묘하게 되었고, 오목한 속에 자그마한 둥근 돌이 있다. 전설에는, “둥근 돌이 그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므로 닳아서 오목하게 된 것이며, 다 닳으면 세상이 바뀐다”고 한다. 섬 전체가 소나무 사이로 대나무가 촘촘하다. 이 때문에 죽도라 이름을 얻었다. 대나무 사이로 커다란 바위에 주절암(駐節巖)이라 새긴 글자가 보인다. '주절(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