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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 결정적인 20장면]여진족 주축·몽골식 훈련…전쟁터서 패배 몰랐던 명장 이성계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명군이 수도 진격해오는 상황에서도 권력투쟁 이어가던 원나라
순제 도망하다 병사하고 황태자는 외몽골로 도피 후 황제 등극

고려 공민왕 명나라 난징에 사신 보내는 등 대륙정세 변화 관찰
이성계 등 앞세워 파저강 일대 차지…랴오양까지 점령했다 후퇴

평지전·산악전·수전 모두 능했던 ‘이성계軍' 여타 고려군단 압도
랴오둥 공격 나선 이성계 회군 우왕 등 숙청…4년 뒤 조선 건국


중국 저장성 동부를 뜻하는 ‘절동(浙東)'의 소금상인 방국진이 1348년 반원(反元) 봉기를 일으켰다. 한족국가 남송(南宋)이 멸망한지 69년 만이었다. 1353년 곽자흥과 서수휘 등이 이끄는 백련교도 반군과 장사성이 이끄는 농민반군이 허난, 안휘, 저장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재상(宰相)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 등의 한족 반군에 연전연승했다. 고려 공민왕은 1354년 7월 급변하는 중원 정세를 파악하고자 류탁, 정세운, 이방실, 안우, 최영(崔瑩), 김용 등에게 2,500여 정예 병력을 주어 토크토아를 지원, 장쑤성 고우(高郵)에 진치고 있던 장사성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현지 고려인까지 가담, 고려군은 2만3,000명으로 늘어났다. 승전을 거듭하던 토크토아는 고려 출신 기황후의 수족 카마의 모함을 받아 재상직에서 해임됐다가 귀양길에 독살당하고 말았다. 한족 반군이 급격히 세력을 불려 나갔다. 원나라가 쇠약해졌다는 것을 파악한 공민왕은 1355년 인당과 최영에게 압록강 서안(西岸)에서 랴오양에 이르는 파사부(단둥 인근) 등 원나라 8개 역참(驛站)을 공격하게 했다. 1356년에는 유인우로 하여금 쌍성총관부(함흥평야 일대)를 점령하게 했다. 고려 영토가 크게 확장됐다.

# 중국 통일한 주원장의 명나라

같은 해인 1356년 동파(東派) 홍건군 수령 중 하나인 곽자흥을 계승한 주중팔(주원장)은 원군의 공격과 기근을 피해 창장(長江) 중하류 집경(난징)으로 남하했다. 장사성은 창장 하류 쑤저우(蘇州)로, 서파(西派) 홍건군 수령 서수휘는 창장 중상류 우창(武昌)으로 이동했다. 동파 홍건군 중 일부는 네이멍구(내몽골)와 랴오둥을 거쳐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난징의 주원장(朱元璋)은 서수휘를 대체한 우창의 진우량과 쑤저우의 장사성에게 에워싸여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진우량은 상관 예문준과 서수휘를 차례로 살해하고 서파 홍건군을 손아귀에 넣을 만큼 과감한 인물이었다. 1362년 토크토아에 이어 원나라를 지탱하던 명장 나이만 차칸테무르가 산둥성 익도에서 암살되었다. 차칸테무르가 암살당한 후 중원 지역도 군벌 각축장으로 변했다.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동근상전(同根相煎) 상황이 된 것이다. 주원장은 진우량과 장사성에게만 신경 쓰면 됐다. 주원장은 창장 중상류로 서진하고, 진우량은 창장 중하류로 동진하여 홍건군 출신 2개 세력권이 겹쳐졌다. 건곤일척(乾坤一擲) 대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1363년 진우량은 주원장 세력의 수도 난징을 직공하는 대신 파양호 남안(南岸) 요충 홍도(난창)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주원장은 유기, 서달, 상우춘 등과 함께 7만~8만명의 병력을 중소형 함선에 태워 난창 구원에 나섰다. 주원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진우량은 대형 함선에 30만 대군을 승선시켜 파양호 입구 후커우(湖口)로 진격했다. 주원장군과 진우량군이 파양호에서 36일간이나 대규모 수전(水戰)을 벌였다. 향락에 빠진 쑤저우의 장사성은 움직일 줄 몰랐다. 주원장은 화공(火攻)에 힘입어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진우량군을 대파했다. 진우량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는 바람에 전투가 끝났다. 파양호 수전 2년 뒤인 1365년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동원, 장사성의 영토를 삭감해 나갔다. 주원장군은 항저우와 우시(無錫)를 점령, 장사성 세력의 도읍 쑤저우를 고립시켰다. 1366년 주원장은 부장 요영충을 시켜 홍건군의 허수아비 황제 한림아(한산동의 아들)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방해물이 치워졌다. 주원장은 1367년 쑤저우마저 점령했다. 쑤저우 점령 후 서달과 상우춘 등이 지휘하는 25만 주원장군이 원나라 수도 대도(베이징)를 향해 진격했다. 명나라군이 북진해 오는데도 원나라 군벌들 간 대립이 계속되었다. 주원장은 북벌군이 대도를 향해 진격하던 1368년 1월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했다. 명나라는 창장 이남을 근거로 한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남(장시성)에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북중국 싼시성과 만주를 근거로 중국을 통일했다.

# 대륙정세 면밀히 살핀 공민왕

명군(明軍)이 대도로 진격해 오는 상황에서도 우유부단한 황제 토곤테무르(순제)와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 간 권력투쟁은 계속되었다. 순제는 황자 시절 고려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으며, 행주 기씨녀를 황후로 맞는 등 고려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순제 시기 원나라 조정은 몽골지상주의자 메르키트 바얀과 그의 조카 한화파(漢化派) 메르키트 토크토아 간 대립에다가 나중 황제파 볼로드테무르와 황태자파 나이만 코케테무르(차칸테무르의 아들) 간 대립도 격화되어 온갖 난맥상을 다 연출했다. 기황후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세조 쿠빌라이 이래 일본, 베트남, 참파(베트남 중남부), 자바 등으로 원정이 계속되어 재정도 붕괴된 지 오래였다. 명군은 1368년 8월 대도를 점령했다. 무혈로 대도를 내어준 순제는 도망하다가 내몽골에서 병사했다. 하지만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는 외몽골까지 도피하는 데 성공하여 원(北元)을 이어갔다. 아이유시리다라는 외몽골 카라코룸으로 수도를 옮기고, 황제로 등극했다(소종). 공민왕은 명나라 수도 난징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대륙정세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명나라 건국 2년 뒤인 1370년 1월 공민왕의 명을 받은 이성계 등이 1만4,000여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함경도 지역)을 출발, 평북 강계를 지나 압록강과 파저강(혼강)을 도하, 홀승골성(오녀산성)을 점령했다. 파저강 일대가 고려 수중으로 들어왔다. 평안도 출신 오녀산성 성주 이오로테무르(이원경)가 항복해 왔다. 그해 10월 공민왕은 지용수, 이성계, 임견미 등으로 하여금 1만5,000여명 대군을 이끌고 혼란에 빠진 북원(北元) 동녕부의 중심도시 랴오양(요동성)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군은 그해 11월 랴오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군량 부족으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나하추가 이끄는 테무게 울루스(왕국)의 몽골군이 추격해 왔다. 1371년 3월 북원 소종(아이유시리다라)은 1372년 코케테무르로 하여금 추격해 온 서달의 15만 대군을 격파, 산시(山西) 북부까지 회복케 했다. 자신감을 되찾은 소종은 공민왕 바얀테무르에게 사신을 보내어 칭기즈칸의 같은 자손으로서 함께 명에 맞설 것을 제의했다. 원나라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한 것이다.

# 고려 최고 실력자 떠오른 이성계

이성계(1335~1408년)의 고조부 이안사는 만주 일대를 지배하던 몽골제국 테무게 울루스(왕국)의 다루가치(고위 군관)를 역임하면서 두만강 유역 간도 옌지(延吉) 일대에서 실력을 길렀다. ‘무신란' 주역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라고 하는 이안사는 1255년 테무게 왕국 2대 칸(汗) 타가차르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에 임명되어 옌지 일대를 지배했다. 이린과 이안사 간 혈연관계는 증명되지 않는다. 이안사가 이린의 손자라는 주장은 네이멍구 무천진 선비족 보륙여씨(대야씨) 출신 수(당)나라 황족이 피지배 한족(漢族) 통치를 위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홍농 양씨(농서 이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1290년 옌지의 세력기반을 상실하고, 처음에는 안변, 나중에는 쌍성총관부의 중심도시 함주(함흥)로 이주했다. 이행리는 1300년경 원나라로부터 다루가치에 임명됐다. 이행리의 아들이 바얀테무르라는 몽골식 이름을 가진 이춘이다. 이춘의 아들이 원나라의 몰락이 확실해 보이던 1356년(공민왕 5년) 유인우의 쌍성총관부 공격 시 고려에 투항한 울루스부카(이자춘)다. 쌍성총관부는 몽골제국의 일부였고, 주민 다수는 여진족이었으며, 이성계 군단의 주축도 여진족이었다. 원나라 말기인 1364년, 칭기즈칸이 가장 아낀 ‘사준사구(四駿四拘)' 중 하나인 무칼리의 후손으로 만주의 몽골 세력을 대표하던 나하추의 지원으로 화주(영흥)를 침공했던 여진족 족장 삼선·삼개 형제는 이성계의 고종사촌이다. 이성계 일가가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족(또는 몽골족) 출신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자춘을 승계한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 군단은 평지전과 산악전, 수전 모두에 능숙했다. 사냥과 어로에 모두 능숙한 여진족 위주로 구성되고, 몽골식 훈련을 받은 이성계 군단은 여타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이성계는 백전백승의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 대명(對明) 온건파 위화도 회군

나하추는 삼선·삼개 형제의 고려 침공에 2년 앞선 1362년 고려 동북부(함흥 일대)를 침공하다가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패했다. 나하추는 1375년 랴오둥반도 남부를 공격하다가 명나라군에게 패했다. 나하추는 1387년 풍승이 이끄는 20만 명군이 근거지 금산(랴오닝성 선양 일대)을 압박해 오자 명나라에 항복했다. 나하추는 명에 항복함으로써 명 주도 동북아 질서하에서 제한된 권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1388년 3월 남옥(玉)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북원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토구스테무르칸의 북원군을 내몽골 후룬베이얼 전투에서 대파하고, 그해 4월 북원 수도 카라코룸을 점령했다.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렸다. 그 직전인 1387년 12월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고려에 원산-함주 지역을 할양(철령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고려-북원 간 연계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1388년 2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장 코초(투르판) 위구르족 출신 설장수(?長壽)가 돌아와 명의 철령위 설치 의사를 확인해 주었다. 설장수 일가는 위구르족의 원고향인 몽골 셀렝가강(설련하·?輦河)의 ‘셀'에서 성씨 ‘설(?)'을 따왔다. 명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1388년 (음력) 5월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우왕의 명령에 따라 랴오둥 공격을 위해 압록강쪽으로 북진했다. 고려군 주력이 북상한 틈을 노려 왜구가 다시 중남부 지방을 침공해 왔다. 패전 가능성과 함께 세력기반(사병 집단) 상실을 우려한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그해 (음력) 6월 압록강 하중도(河中島)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이소사대(以小事大)'를 주창한 이성계의 회군으로 인해 조선의 명나라 사대(事大)가 결정되었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남하, 군사력을 동원하여 우왕과 최영 등을 숙청했다. 1388년 11월 테무게 왕가의 마지막 칸 아자스리도 명나라에 투항했다. 이성계는 신흥사대부의 대표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해 나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4년 뒤인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은 명과 함께 몽골제국의 잔해를 자양분으로 태어난 동아시아 국가 중 하나다(강원대 윤은숙 교수).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