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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결정적인 20장면]대륙 호령한 후고려의 발자취…남시베리아 최대 고분군서 확인

(7) 후고려(발해), 헤이룽장(아무르강) 이북으로 진출하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토번·후돌궐 대두로 당 영향력 약화
대조영 부자 등 이끈 전고려 유민세력
698년 투먼 동모산 일대 중심으로 건국
일본과 외교과정 스스로 ‘고려'라 칭해

아무르강 상류 실카강 유역까지 진출
유적서 위구르 토기·경교 십자가 발견
초원의 길 따라 중앙亞·중동과도 교류
唐·日 무역도 활성화 경제 발전 도모

예맥(고구려·부여)·말갈계뿐 아니라
거란계 비롯 소그드(이란)계도 거주
10대 ‘선제' 재위기에 최전성기 맞아
840년경 이후 한반도 북부 통제력 상실


# 당 추격군 격파하고 국가 재건

전고려(고구려) 멸망 불과 2년 뒤인 670년 7월 설인귀의 당군(唐軍) 10여만이 티베트 고원에서 굴기(?起)한 토번제국(618~842년) 대군과의 칭하이(靑海) 다페이촨(大非川) 전투에서 대패했다. 토번은 그 직전인 669년 당나라에 속한 서역(신장) 안서 4진을 점령했다. 토번 전선 상황이 급박해지자 랴오둥의 당군은 671년 7월 전고려 부흥군의 보루 안시성을 점령한 후 토번 전선으로 이동해 갔다. 당나라 축출 전쟁에 돌입했던 신라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당나라는 678년 토번과의 칭하이 칭펑링(承風嶺) 전투에서 다시 참패했다. 강대해진 토번은 간쑤, 쓰촨, 윈난 등의 당나라 영토를 수시로 공격했다. 당이 몽골고원과 오르도스(河套) 주둔 병력 대부분을 철수시키자 전돌궐제국 칸의 후예 아쉬나 쿠틀룩, 카프간 형제와 아쉬더 톤유크 등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후돌궐제국(683~734년)을 세웠다.

영주(차오양)로 강제 이주당해 있던 전고려 유민들은 토번과 후돌궐의 대두로 인해 당의 영향력이 약화돼 가던 상황에서, 돌궐의 재기에 자극받은 시라무렌(潢水) 유역 거란족이 봉기하자 그 틈을 타 국가 재건에 나섰다. 영주에는 4세기 모용선비의 침공으로 포로가 됐던 고구려인(고영숙 墓誌 참조)과 부여인(라마동 집단묘 참조) 후손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걸걸중상 대조영 부자와 걸사비우 등이 이끄는 전고려(고구려) 별종(別種) 속말말갈 주도 유민세력은 전고려가 멸망한 지 30년 되는 698년 당나라 추격군을 격파하고, 두만강 유역 투먼의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후고려(보하이·渤海)를 세웠다.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걸걸(乞乞)' 또는 ‘걸(乞)'은 우리말 ‘클(크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대조영과 대야발을 포함한 걸걸중상의 자손들이 대씨(大氏)를 칭한 것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나라는 후고려를 북적(北狄) ‘보하이(渤海)'라 불렀다. ‘보하이'는 삼국지 원소가 태수를 지낸 보하이만 연안도시이기도 하다. 후고려 스스로는 ‘고려'라 했다. 2대 무제 대무예는 720년 일본이 사신을 보내오자 727년 답사(答使)를 보내 ‘고려가 부여, 고구려의 습속(習俗)을 계승, 여러 번국(藩國)을 감독하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알렸다.

# 아무르강 유역·동몽골까지 영토

전고려(고구려)가 다링허 유역에서 한강 유역까지를 영토로 했던 데 비해 후고려(발해)는 대동강 유역에서 아무르강(카라무렌·黑龍江) 유역과 동몽골까지를 영토로 했다. 무제는 아무르강 유역 흑수말갈 처리 문제로 당과의 사이가 틀어지자 732년 해군을 보내 당의 후고려 공격기지가 될 수 있는 산둥반도를 선제 공격했다. 733년에는 당의 랴오시를 공격한 거란돌궐 연합군에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다. 후고려는 3대 문제 재위기(737~793년) 안록산-사사명의 난(755~763년)으로 당나라가 혼란에 처하자 랴오둥으로 서진(西進), 현도주와 목저주를 설치했다. 후고려는 문제시기 상경성(헤이룽장성 닝안)을 조성했는데, 상경 홀한성 제2 궁전 규모가 당나라 수도 장안의 함원전보다 훨씬 더 컸던 것으로 확인된다. 2004년 문제 대흠무의 배필 효의황후, 2009년 9대 간제(簡帝) 대명충의 배필 순목황후 묘지(墓誌)가 발굴됐다. 부인이 황후이면 남편은 당연히 황제로 호칭됐을 것이다. 짧은 기간 재위한 간제도 ‘태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10대 선제(재위 818~830년) 대인수 시기 후고려는 당나라가 번진(藩鎭) 세력으로 분열되자 랴오둥의 소고구려는 물론 건안성의 웅진도독부 백제 유민도 흡수했다. 아무르강 북안(北岸) 블라고베셴스크(만주 헤이허 건너편) 인근 1천여 기(基)의 옛 무덤이 밀집된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남시베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군으로 후고려 고분군으로 확인됐다. 후고려는 아무르강 상류 실카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역사 지도 수정이 필요하다.

신라는 후고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대동강 유역과 하슬라(강릉)에 장성을 쌓아야 했다. 후고려 유적들에서는 소그드 은화, 위구르 토기, 경교(景敎) 십자가 등 중앙아, 중동 지역 유물도 발굴됐는데, 이는 후고려가 ‘초원의 길'을 통해 중앙아, 중동 지역과도 교류했음을 말해준다. 후고려는 선제 재위기 최전성기를 맞았다. 선제는 후고려의 경제 발전을 위해 당, 일본과의 무역을 활성화했다. 선제는 일본에 5차례나 사절을 보냈다. 후고려는 840년경 이후 한반도 북부 영토 상당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지역에 보로국, 흑수국과 같은 독립소국들이 나타났다.

# 다민족 국가였던 전·후고려

말갈(Mohe)은 ‘삼국사기' 포함 여러 사서의 고구려, 백제, 신라 관련 기사에 자주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종종 말갈과 충돌했다 한다. 이들은 맥말갈(貊靺鞨), 예말갈(濊靺鞨)로도 표현된다. 함흥-원산-안변-춘천 등 오늘날 함경도와 영동·영서 주민들도 예말갈 또는 맥말갈이라 한다. 신라 말 경명왕 시기인 921년 ‘말갈(달고부)이 신라 북변을 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갈 거주지는 경상도·강원도에서 동해안을 따라 캄차카 반도와 알루샨열도까지 연결된다.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알루샨열도에서도 아이누와 함께 말갈 유적이 종종 발견된다. 사서(史書)가 ‘말갈'로 뭉뚱그려 말한 사람들 모두 언어와 습속 등에서 동일하지는 않다. 말갈의 후예인 생여진(生女眞)에서 기원했으며, 현재 아무르강 유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허저(나나이), 오로춘, 울치족 등은 서로 동족의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한반도 인근 말갈과 흑수말갈은 중세 이후 역할이 크게 다르다. 흑수말갈은 나중 숭가리 울라(송화강) 유역으로 남하, 금(金)나라를 세웠다. 전·후 고려가 멸망한 다음 청천강-안변 이북에는 말갈과 그 후예 여진이 주로 거주했다.

그런데, 전고려 시대 함경도와 영동(嶺東) 대부분은 동예인과 맥인, 옥저인의 땅이었다. 동예인, 맥인, 옥저인 모두가 말갈로 바뀌었다는 뜻인가? 전고려의 2대 축 국내성 지역(압록강 유역)과 책성 지역(두만강 유역) 예맥계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7세기 말 당나라에 항복하기 직전 책주(柵州) 도독 겸 총병마를 역임한 이타인(李他人) 묘지(墓誌)에 의하면, 그는 재직 시 12주, 37부 말갈을 관장했다 한다. 말갈 대부분이 전고려인이었다는 뜻이다. 전·후고려 모두 다민족 국가였다. 후고려에는 예맥(고구려·부여)계, 말갈계뿐 아니라 거란계, 실위(몽골인의 선조)계, 심지어 소그드(이란)계도 거주했다. 후고려의 공용어는 고구려(부여)계 언어로 추정된다. 일부 사학자가 전고려인을 고(구)려인, 말갈인으로 구분, 표현한다. 이는 맞지 않다. 미국에는 영국계, 한국계, 아프리카계 등 다양한 계통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 국경 밖에는 영국, 한국, 멕시코 등이 별도로 존재한다. 후고려인을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미국인을 미국인(영국계)과 이탈리아인, 러시아인 등으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우리 역사에서 이른바 ‘오랑캐' 말갈을 제거하기 위해 후고려 지도층은 고(구)려인, 기층은 말갈이었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주장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초, 우리 역사공간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외국에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울루스부카(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말갈(여진)의 후예로 보인다. 이성계의 사촌 삼선·삼개 형제와 부하 퉁두란(이지란·쿠룬투란테무르)은 여진인이었다. 이성계는 이지란 외에도 주매, 금고시테무르, 허난두, 최야오내 등 10명 이상의 여진인의 보좌를 받았다. 김(金), 박(朴), 태(太) 등을 제외한 이(李), 최(崔), 정(鄭), 백(白) 포함, 우리 성(姓) 대부분은 고려 초 이후 한족(漢族) 성(姓)을 차용한 것이다. ‘오랑캐꽃'의 시인 이용악도 여진인의 피를 받았다. 두만강 유역 회령과 온성 등에는 1960년대까지도 ‘재가승(在家僧) 마을'이라는 여진촌이 있었다.

# 급작스러웠던 후고려의 멸망

한편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Yaruud Asamki)는 925년 말~926년 초 20만 대군을 동원, 외교적으로 고립된 후고려를 급습, 정복했다. 야율아보기는 상경 홀한성(헤이룽장성 닝안)을 중심으로 ‘동쪽의 거란'이란 뜻의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장남 야율돌욕(이찬화)에게 통치를 맡겼다. 동란국은 불과 2년 뒤 랴오허 유역 랴오양으로 천도했다. 후고려 정복 직후 후고려 중심지 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그만큼 후고려의 멸망은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랴오둥으로 이주당한 후고려인은 9만4,000여 호라 한다. 40만~50만명에 가까운 수다. 이들은 260여년 이상 ‘후고려인(발해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흑수말갈이 주축이 된 완안여진 금나라가 1126년 화베이(華北)를 점령하고 난 다음 랴오둥의 후고려(발해) 공동체인을 산둥반도로 다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써 후고려 공동체는 소멸됐다. 후고려 옛 땅에 남은 자들은 거란에 대항,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거란군이 지름길(契丹道)을 통해 수도 홀한성을 습격하는 바람에 큰 손실 없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압록강 중류를 기초로 한 오씨(烏氏) 정안국(938~986년)이 대표적이다. 후고려 멸망을 전후해 대광현, 대화균, 박승을 비롯한 후고려인 10만여명이 고려에 내투(投)했다.

# 견훤의 백제·궁예의 고려 등장

신라도 9세기 초 이후 위기에 처했다. 나물마리칸계에 밀린 무열왕계 김헌창이 822년 3월 웅주(공주)에서 거병했다가 진압 당했다. 왕권 불안정은 신라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호족세력이 발호했다. 청해진(완도), 당성진(화성 남양), 혈구진(강화), 패강진(평산 또는 은율)이 대표적이다. 신라 군진들은 당 번진(藩鎭), 일본, 후고려 등과의 교역 등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국왕 즉위와 폐위에도 관여했다. 신라 해적이 일본과 중국 해안을 약탈했다. 해적 선단을 지휘한 대표적 인물이 ‘현춘'인데, 현춘은 894년(진성여왕 8년) 함선 100척에 2,500명의 병력을 태워 쓰시마를 침공했다.

혼란한 정치·사회 상황에서 신라군 지휘관 출신 진훤(견훤)은 900년 ‘백제'(후백제)를 세웠으며, 신라 왕자 출신 김궁예는 901년 송악(개성)에서 ‘고려'(마진, 태봉으로 개칭)를 세웠다. 918년 김궁예의 부장 왕건이 김궁예를 축출하고 국명을 다시 ‘고려'라 했다. 전고려계 해상세력으로 추정되는 왕건(왕건은 이름으로, 앞 글자 ‘왕'을 성으로 삼았다.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 할아버지는 작제건이다.) 일족은 경기만 군진세력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936년 고려와 후백제 간 최후의 일리천(선산) 전투에서 왕건의 부장 유검필(庚黔弼) 휘하 1만여 기병부대는 흑수말갈과 투르크(터키)계 철륵(Toles) 출신이 주축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후고려 유민 다수가 고려군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927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대패했던 고려군은 유검필 주도로 후고려 유민들을 대거 흡수한 다음 벌어진 930년 고창(안동) 전투와 934년 운주(홍성) 전투에서는 크게 승리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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