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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역사 결정적인 20장면]몽골에 9차례나 침략당한 고려… 처절할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오고타이칸 몽골 사신의 피살 핑계로
1231년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격 명령
살레타이는 용인 처인성 전투서 사살
무신정권 중심으로 이어진 대몽항쟁
1270년 11월 몽골에 항복 원제국 복속
항거의 역사 덕에 고려 정체성은 지켜
공민왕 홍건군 침공에 안동까지 몽진
20만 의용병 분전으로 겨우 개경 탈환
원나라 군벌 이성계도 참전 큰 공 세워
한족이 이민족 침략에 위축됐을 시절
보수·폐쇄적 철학체계 성리학 나타나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통치이념 삼아


# 거란족에 몽골 방어하게 한 ‘금'

시베리아의 삼림민족 투르크(터키)계 키르키즈족(Kyrgyz)이 9세기 몽골고원으로 남하했다. 키르키즈족에게 패한 위구르와 카를룩 등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은 대부분 몽골고원을 떠나 신장(新彊) 포함 서역으로 이주했다. 키르키즈족도 몽골고원에 정착하지 못하고 원주지로 되돌아갔다. 투르크계가 서천(西遷)한 후 북만주의 실위몽올(室韋蒙兀)이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몽골고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몽골제국을 세우는 칭기즈칸(테무친)은 동북몽골 오논강 유역 몽골부 보르지긴씨족 출신이다. 칭기즈칸의 외가, 처가 모두 내몽골 후룬베이얼(Hulunbuir) 초원을 근거로 한 투르크계 옹기라트부다. 몽골고원은 한랭·건조해 생산성이 매우 낮다.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에 달하는 몽골고원 전체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칭기즈칸 당시 120만여명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칭기즈칸이 거느린 병사 수도 10만명을 넘지 못했다. 몽골고원 주민은 기근 발생 시 식량 포함 생필품을 농경지대로부터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패권국 여진족의 금(金·Amban Alt?un Gurun)은 피지배 거란족으로 하여금 몽골을 방어하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취했다. 칭기즈칸은 금이 쳐놓은 ‘분열을 통한 통제'라는 그물을 벗어던지고, 1206년 메르키트와 케레이트, 나이만 등 몽골고원 부족들을 통일했다. 칭기즈칸은 피정복 부족들을 해체·재편하고, 행정과 군사조직을 겸하는 십호·백호·천호·만호제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몽골은 1205년, 1206년, 1209년 3차례에 걸쳐 오르도스(황허가 크게 원을 그리는 만리장성 북쪽)의 흥경(銀川)을 수도로 한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서하(西夏)부터 공격했다. 그는 ‘오아시스의 지식인'이라고 불린 신장의 코초(高昌·투르판) 출신 위구르인들을 등용하고, 위구르 문자도 채용했다. 몽골고원에서 출발해 중국과 만주, 티베트, 중앙아, 중동, 동유럽으로 뻗어 나간 원(元) 포함 몽골제국 역사를 (중국사가 아니라) 몽골사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 강원·충청서 후요 세력과 전투

몽골은 1211년부터 금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베이가 주요 공격 루트였다. 1211년 8월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군은 베이징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의 외곽 오사보(烏沙堡)와 야호령(野狐嶺) 전투에서 금(金) 정예군을 대파했으며, 거용관을 넘어 수도 옌징(베이징)을 포위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물러났던 몽골은 금이 수도를 황허 남안(南岸) 카이펑으로 옮기자 다시 금을 공격, 1215년 옌징을 점령했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자 피지배 거란족이 봉기, 1212년 거란 황가의 후예 야율유가의 지휘 아래 랴오둥(遼東)에 동요(東遼)를 세웠다. 금이 완안호사와 포선만노가 이끄는 대규모 토벌군을 보내자 동요는 언어와 습속이 유사한 몽골에 투항, 금에 대항하기로 했다.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동요군은 2차례에 걸쳐 금군을 대파했다. 이때 야율유가의 동생 야율시불 등은 몽골 투항을 반대,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몽골 고위 군관)를 살해하고 후요(後遼·대요수국)로 떨어져 나갔다. 몽골과 동요, 포선만노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운 동진군(東眞軍)에게 3면 공격받아 오갈 데 없어진 후요 유민세력 약 9만명은 1216년 8월과 12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다. 강원도와 충북 지역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철원과 춘천, 횡성, 원주, 평창, 강릉, 제천, 충주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원주에서는 무려 9차례나 전투가 벌어졌다. 원주의 산성이 함락돼 큰 피해를 입었다. 후요 세력은 한때 수도 개경마저 위협했다. 고려군의 반격에 밀려난 후요 세력은 1218년 가을 평양 동쪽 강동성에서 △고려군 △몽골군 △동진군에게 포위당했다. 1219년 2월 최후의 수령 야율함사가 자결하는 처절한 전투 끝에 후요 거란인 4만~5만명이 생포됐다. 고려군 지휘자는 조충과 김취려, 몽골군 지휘자는 카치운(哈眞)과 살레타이, 동진군 지휘자는 완안자연이었다. 생포된 거란인 중 700여명이 제천, 원주, 충주 등으로 집단 이주됐다. 제천 박달재 근처에 거란족 집단촌 거란장(契丹場) 흔적이 남아 있다.

# 고려 전역에 주둔했던 몽골군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1217년 옌징에 막부(幕府)를 개설한 잘라이르부 출신 무칼리는 허베이, 산둥, 산시 등 화베이(華北) 각지를 공략했다. 1220년 시작된 호라즘 제국(Khwarezmian Empire) 포함 중앙아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몽골군 본대는 1227년 서하를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도륙했다. 1229년 칭기즈칸을 계승한 오고타이(우구데이)칸은 고려에 보낸 몽골 사신이 피살된(1225년) 것을 핑계로 1231년 잘라이르부 출신 살레타이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했다. 살레타이는 1232년(고종 19년) 2차 고려 침공 시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에게 사살됐다. 몽골은 40여년간 총 9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최씨(최충헌-최우-최항-최의) 정권은 1232년 7월 강화도로 천도해 몽골에 저항했다. 고려 육지 전역이 몽골군에 짓밟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려는 최씨에서 김씨(김준)-임씨(임연-임유무)로 이어진 무신정권을 중심으로 처절했던 대몽(對蒙) 항쟁 끝에 1270년(원종 11년) 11월 결국 몽골에 항복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세운 원제국(元帝國)에 복속됐다. 몽골군이 압록강 유역부터 안동, 광주(光州), 창원(마산), 제주까지 고려 전역에 주둔했다. 원은 고려 영토 내에 직접 통치기관인 쌍성총관부(함흥 일대), 동녕부(평안도 일대, 나중 랴오허 유역 랴오양으로 이동), 탐라총관부(제주도)도 설치했다. 몽골은 고려를 압박해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도 동참하게 했다. 몽골은 지원 기관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관리도 파견했다. 고려는 1,800척의 함선 등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1차 1만5,000명, 2차 2만7,000명의 병력도 제공해야 했다.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몽골 침공 전 대내적으로는 황제)은 원 황제의 제후왕(諸侯王)으로 격이 낮아졌다. 제후왕으로 전락, 사후(死後)에 조(祖) 또는 종(宗)을 붙여 시호(諡號)를 지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처럼 왕호에 ‘충(忠)'을 붙였다.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이했으며, 원칙적으로 정비에게서 난 아들을 왕세자로 임명해야 했다. 몽골 혼혈의 고려 왕들은 왕세자 시절 원나라 수도 대도(베이징)에 인질로 머물다가 즉위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식 변발에다 주로 몽골어를 사용했다. 충선왕(이지리부카) 등은 원황실 내 권력투쟁에도 가담했다. 고려는 9차례 40여년 간의 몽골 침공에도 불구하고 처절할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몽골은 황자였던 쿠빌라이가 1259년 후베이(湖北) 샹양(襄陽)에서 만난 고려 태자 왕식(원종)에게 약속한대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 하여 고려 왕조를 유지시키는 한편, 고려의 습속은 건드리지 않았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만주 지역을 영지(領地)로 받은 동방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카치운·테무게, 테무게 가문이 가장 강력)를 견제하고자 부마국 고려를 이용했다. 원나라는 남만주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데는 남만주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고려인 통제에 편리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의 지배자인 테무게 왕가의 고려 방면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강원대 윤은숙 교수).

# 원나라에 쫓긴 홍건군의 침공

1351년 황허 제방 공사에 징용된 한족 농민들이 북송 휘종의 후손을 자처한 백련교(白蓮敎) 교주 한산동의 선동으로 허난에서 봉기했다. 원나라군은 한족 백련교 농민반란군을 공격해 격멸했으며 한산동을 붙잡아 처형했다. 명교(明敎)로도 불린 백련교는 허난과 안후이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구축했다. 백련교 봉기군은 붉은 두건을 하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으로도 불렸다. 홍건군의 봉기를 필두로 한족 농민 반란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한산동의 부하 유복통은 1355년 카이펑을 중심으로 송(宋)을 세우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송은 원나라 조정의 목표가 돼 명장 나이만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1359년 카이펑이 차칸테무르군에게 점령당하자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와 함께 벽지로 도주했다. 한산동, 유복통과 같은 동파(東派) 홍건군 북부지대를 이끌던 모거경과 관선생 등은 산시 따퉁(大同)을 약탈한 후 동북진하여 원나라 여름 수도 네이멍구의 상도 개평부(돌룬 노르)를 점령했다. 원나라군이 추격해 오자 홍건군은 랴오허를 건너 랴오양(요동성)을 점령하고,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홍건군은 허베이로 되돌아가고자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으로 탈출로가 막히는 바람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진한 것이다. 홍건군의 2차 침공 시 고려는 짧은 기간 개경을 빼앗기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고려는 1362년 1월 정세운, 김득배, 안우, 이방실 등이 모집한 20만 의용병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개경을 탈환할 수 있었다. 고려 동북면(함경도)의 원나라 군벌 이성계(1335~1408년)도 여진족 위주로 구성된 2,000기(騎)를 이끌고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책략가적 기질의 공민왕은 전쟁 후 20만 대군을 거느린 정세운, 김득배, 안우, 이방실 등이 부담스러워 계략을 써 모조리 살해했다.

# 중국 중심 화이론의 기초 성리학

한편 이민족 금(여진족)과 서하(탕구트족), 대리(백족)에 눌려 있던 남송(南宋)의 주희(1130~1200년)가 완성한 성리학(性理學)은 우주가 기(氣)라는 물질로 구성됐다고 본다. 주희는 인간 본성은 본디 맑지만(성선설)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뒤틀려 있으므로 학문을 통해 인간의 본성, 즉 ‘리(理)'를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리학(주자학)은 선불교(禪佛敎)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왕(왕세자)을 수행, 대도(베이징)에 체류했던 안향, 백이정 등이 받아들여 조선시대 이황, 이이, 송시열 등이 발전시킨 성리학은 결국 교조주의로 흘러갔다. 중화숭앙을 고수한 성리학자들의 숭앙대상은 명(明)에서 19세기 말 이후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후 숭앙대상은 다시 한국에서는 미국, 북한에서는 소련으로 바뀌었다. 성리학은 한족(북송·남송)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려 위축됐을 때 나타난 보수적·폐쇄적 철학체계다. 성리학은 한족(漢族)을 제외한 이민족 ‘오랑캐'는 멸시받아 마땅한 비문명적 존재(짐승)로 여겼다. 주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우주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라고 봤다. 몽골 또한 예(禮)와는 거리가 먼 오랑캐이므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소식(소동파)과 주희 포함 한족 사대부들의 눈에는 고려나 조선할 것 없이 오랑캐 맥적(?狄)이었다. 성리학은 중국 중심 ‘화이론(華夷論)'의 기초가 됐다. 고려 말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이 ‘중국에 이은 제2의 문명국'이라는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심화됐다. ‘화이론'과 ‘소중화주의'는 조선에서 유사종교 수준으로 발전했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소중화주의의 관점에서 조선을 오랑캐 몽골, 여진, 왜 등과는 다른, 즉 한족의 명(明)과 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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