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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끝내 못다 이룬 애틋한 사랑에 시간 조차 멈춘듯

[조선시대 핫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10)평창 청심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강릉대도호부 부사 양수 떠나보내며
벼랑에 몸 던진 청심의 이야기 전해져
1788년 금강산 가던 단원도 화폭 담아
오대천가에 우뚝 선 바위 백척 되는듯
뾰족한 바위 기이하고 소나무는 늠름


1788년 정조대왕이 김홍도를 불렀다. 금강산을 그려 오라는 명을 받은 김홍도는 그림 여행길에 올랐다. 영월 주천에서 청허루를 그렸다. 평창 대화를 지나 모노령(모릿재)을 넘은 후 청심대(淸心臺) 앞 하천을 건너서 화첩을 꺼냈다. 대부분 시와 여행기에 묘사된 청심대는 김홍도가 섰던 곳이 아닌 청심대 뒤로 난 오솔길에서 본 모습이었다. 오대천 가에 우뚝 선 바위가 백 척 이상 되는 듯했다. 뾰족한 바위도 기이하지만 바위틈에 늠름하게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밑에 흐르는 오대천과 모노령으로 향하는 오솔길도 그렸다. 길 위에 선 여행객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청심대와 관련된 청심(淸心)의 이야기는 심언광(沈彦光·1487~1540년)의 시에 등장할 정도니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있던 양수(梁需)가 한양으로 돌아갈 무렵인 1418년부터 이야기가 전해져 왔을 것이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병조 참의로 있던 양수가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임명된 것은 1412년인 태종 12년이다. 강릉에 머물던 그는 청심과 정을 나누었다. 임기가 끝나 떠나는 양수를 배웅하기 위해 대관령을 넘어 오대천까지 왔다. 부사 일행이 오대천가의 높은 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하는 동안 그녀는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청심대 위 정자는 1927년에 세웠다. 대 아래는 청심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청심의 절개를 기리는 여러 개의 비석이 유난스럽다. 청심은 왜 자기 몸을 던졌을까? 청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원인 제공자는 양수일 가능성이 높다. 임기가 끝나면서 사랑도 끝내려는 양수와 받아들일 수 없는 청심. 표변한 양수를 고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바꾼 것은 아닐까? 청심이 죽고 난 후 그녀는 절개의 화신이 되었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를 기리는 위선적인 행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절개를 기리는 사당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지금은 청심대로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쉽게 올라갈 수 없었다. 멀찍이 바라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홍우원(洪宇遠·1605~1687년)은 직접 청심대에 올랐다. 가파른 바위를 잡고 오르니 발길 아래가 까마득하다.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물이 금강연을 거쳐 청심대 발치를 가볍게 부딪친다. 물은 다시 정선을 거쳐 한양으로 흘러간다. 길은 청심대에서 진부로 향하기도 하고 정선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한양길이 바쁜 이는 모노령을 넘는다.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청심대(淸心臺)에 올라'서다.

“흰 안개 펼쳐졌다 다시 모이고, 푸른 산 어두웠다 환히 개네. 달리는 시냇물 벼랑에서 갈라지고, 가느다란 잔도 한 줄기 돌아나네. 높은 데 오르니 피곤함을 잊고, 그윽한 곳 찾으니 흥 가라앉지 않네. 백 척이나 되는 청심대(淸心臺)에서 말 세워놓고 다시 이리저리 거니네.”

신익성(申翊聖)은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에서 청심대 옆에 우물이 있는데 우동(于同)이라 하며, 물맛이 아주 훌륭해 오대산의 물과 다르지 않다고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며 청심대 주변은 예전과 달라졌다. 오솔길은 넓은 길이 되었다. 험한 고갯길 때문에 악명을 떨치던 모릿재는 이제 터널이 생겨서 평범한 고개가 되었다. 정선으로 향하는 길은 이제 청심대를 거치지 않고 직선화되었다. 길손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하던 우물은 도로공사를 하면서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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