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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멈춰선 도시, 송두리째 바뀐 일상…대구는 아직 울고 있다

[코로나19, 난민이 된 대구시민] 上
"몇 달째 매출 0원… 매일 낮술만"
'알바'조차 없어 생활비 부담 신음

 

대구시민은 2020년 2월 18일을 기억한다. 코로나19 대규모 집단감염의 시작이었던 '31번 환자'가 발생한 날이다. 확진자 수는 이튿날 11명, 그 다음 날 34명으로 급증했다. 2월 23일 처음으로 세 자릿수를 기록했고, 29일 741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한동안 두 자릿수로 내려오지 않았다.

 

도시는 멈춰섰고, 시민들의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시민들로 붐비던 동성로는 텅 비었고, 서문시장도 적막감에 휩싸였다. 자영업자들은 문을 닫아걸었고, 직장인들은 고용 불안에 떨었다.

 

한동안 숨죽였던 코로나19는 8월 들어 다시 확산됐다. 시민들은 실낱같은 희망마저 재확산과 동시에 사라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매일신문 기획탐사팀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힘겨워하는 자영업자와 취업준비생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내러티브 저널리즘'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낮술로 답답함 달래는 60대 여행사 대표

 

오전 9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햇살이 쏟아지는 바깥과 대조적으로 집안은 고요했다. 가족들은 모두 직장으로, 학교로 흩어진 뒤였다.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일어나봤자 할 일도 없을 텐데…."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어거지로 눈곱을 떼고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매일 아침 시청하는 58부작짜리 중국 무협 드라마다.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면서 아침 겸 점심을 대충 챙겨 먹었다.

 

여행업계에 몸담은 지 35년째. 불과 9개월 전만 해도 내 하루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오전 6시 집을 나와 사우나로 갔고, 늦어도 오전 8시 40분쯤 사무실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했다. 직원도 네 명이나 데리고 있었다. 여행 상품을 기획하고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과 함께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됐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사무실에 도착했다. 지난 3월 이후 텅 비어 있는 사무실 벽 한 켠에 쌓아둔 소주병 수십 개가 나를 반겼다. 매출을 기록하던 장부에는 몇 달째 '0'이라는 숫자만 쓰였다. 직원들은 모두 유급 휴직을 보냈다.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이 끝나는 연말이면 모두 내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여행업계가 몇 년 전부터 심각한 불경기를 겪어온 건 사실이다. 메르스(MERS)와 중국과 사드(THAAD) 갈등, 일본 불매운동을 거치며 인구 대비 최대 규모였던 대구 여행업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예 사무실 문을 닫아걸었던 적은 없었다.

 

틀어둔 TV에서는 '영세 여행사업자는 2차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손님 상담용으로 쓰던 테이블에는 '-30만원'이 찍힌 2/4분기 부가세 영수증이 보였다.

 

원래는 분기마다 200만원씩 내던 부가세였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환급을 받은 것이다. 이 사무실만 해도 월 400만~500만원의 고정비가 든다. 지금까지 대출을 받고 적금을 해약해가며 버텼지만 얼마 못 갈 것 같다.

 

냉장고에서 남은 소주 반 병을 꺼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오뎅탕 끓여 놨는데, 한 잔 하러 오이소." 옆 건물에서 여행사를 하는 강 사장이었다.

 

술자리에는 여행사를 하는 지인 5명이 모여 있었다. 곧 모두 '전직' 여행사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한 헛웃음만 나왔다. 바빴던 시절에는 오후 2시부터 모여 낮술을 마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할 일 없이 시간만 때우는 신세가 된 지금은 꽤나 익숙한 풍경이 됐다.

 

"연말이면 본격적으로 폐업과 퇴직이 시작될 것 같은데…. 직원들도 문제지만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나." 요즘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곤 푸념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 모인 5명이 연간 3천 명이 넘는 대구시민들을 여행길에 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합계 월 소득 0원. 매달 가게세만 축내는 신세다.

"젊은 애들은 배달이라도 하겠지만 예순 언저리인 우리는 생각하기 어려워. 생활비를 한 푼도 갖다주질 못해 20년 넘게 가정주부로 있던 아내가 일을 시작했지.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 하니, 아내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어."

 

오후 5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도 사무실에는 빈 소주병 7개가 쌓였다. 초가을이 되면서 부쩍 짧아진 해가 어느덧 산자락에 걸렸다. "자, 이제 집으로 가야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뒤늦게 올라온 술기운이 서러웠다.

 

 

◆소박한 꿈도 꾸기 어려운 20대 취업준비생

 

도서관을 나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잠시 들른 동촌유원지에서 선선해진 가을바람 속 오리배를 구경하며 또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고향 울릉도를 떠나 뭍에 나온 지 10년째. 스무 살 어린 학생이던 나는 어느새 서른 살 청년이 됐다. 그 절반이 넘는 시간을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보냈다.

 

2014년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취업준비 기간이 길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5년 준비한 9급 공무원 시험을 포기했을 때도, 마음먹고 열심히 준비하면 금방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은 내 생각과 달랐다. 복수전공을 포기한 국어국문학과 출신 여성에게 허락된 직업은 많지 않았다. 한때 정부의 취업성공패키지를 통해 도배와 미장 일을 도전했지만, 육체적 피로가 심한 탓에 4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어렵사리 시작한 도전에 '실패'라는 결과가 쌓일 때마다 자괴감만 커져 갔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하나도 없더라구요. 채용공고가 나와서 이력서를 내 볼 만한 기업도 평소의 10%밖에 안 되고….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힘들긴 힘든가 봐요." 집 근처 노점에서 붕어빵을 사먹으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걱정할까 봐 친구나 가족들에게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지만, 어쩐지 붕어빵집 아저씨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취업준비 기간이 길어 불안했던 내 삶은 코로나19로 더 고달파졌다. 필수인 토익시험을 비롯해 자격증 시험 대부분이 연기됐고, 기업들은 채용 문을 닫아걸었다. 그나마 나오는 채용공고조차 대부분 이공계 대상이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줄면서 생긴 경제적인 부담이 가장 어렵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대구에 사는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월세는 들지 않지만, 모아둔 돈을 까먹으면서 사는 생활만 몇 년째다.

부업으로 자기소개서 첨삭이나 대필을 해주기도 했고, 3시간에 3만원을 받고 남의 집 청소를 해주는 아르바이트도 했었다. 그 일을 하면서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이제는 다 내려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벌이를 위해서는 쪽팔림도 사치다.

 

이런 아르바이트조차 코로나19로 없어졌고, 도배 일을 4개월 정도 하다가 다시 뛰어든 취업시장은 예전보다 더 얼어붙었다. 손에 든 휴대전화 화면에는 '코로나19로 공개채용이 뚝 끊겼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였다. '바늘구멍'이니 '11년 만에 최저'같은 단어가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얼마 전 운전면허 도로주행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나는 이런 것까지 떨어지는구나" 싶어 더 큰 자괴감에 빠졌다. 자괴감이 불안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남들은 잘도 직장을 구하고 결혼까지 하는데 나만 아직 자리를 못 잡은 것처럼 느껴진다. 자전거를 타면서 잡념에 빠지는 게 요즘 일과다.

 

어릴 때는 장래희망을 물으면 거창한 꿈을 이야기했다. 이제는 소박한 꿈만 가지고 산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의류 회사 직원, 혹은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정도다. "하필 둘 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업종이네…." 또 한숨이 나왔다. 붕어빵을 다 먹었으니 이제 다시 집으로 가야지. 오늘 하루가 성과 없이 또 저물어가고 있다.

 

◆"1년은 버틸 수 있을까" 50대 노래방 사장

 

대구 광장코아, 일명 '광코' 주변에서 노래방을 운영한 지 6년째다. 2014년 9월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노래방을 인수했다. 권리금 7천만원, 보증금 5천만원 등 1억2천만원의 초기 투자비용이 들었다. 입지가 좋고 상가도 커 임차료가 월 200만원에 달했다.

 

20~30대 청년 유동 인구가 많아 생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법인택시 기사인 남편, 대학생 아들과 함께 서구 한 월셋방에 사는 처지에서 벗어나고 아들 뒷바라지까지 하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점포 임차료와 저작권료·신곡구매료, 점포 운영에 드는 여러 부대비용을 합치면 고정지출은 월 300만원가량 든다. 다행히 2018년까진 월평균 500만원, 연말엔 최대 월 2천만원까지 벌면서 지출을 충당하고 가계에도 힘을 보탤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들어 악화된 불경기에다 올해 2월 대구의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우리 가정은 사실상 빚더미에 올랐다. 음주 문화가 변하면서 2차로 노래방 대신 카페에 향하는 이들이 늘어난 데다, 올해 초엔 코로나19까지 확산해 노래연습장 기피 현상이 커졌다.

 

대구 노래연습장 업계는 코로나19가 유행하던 2월 19일부터 1개월간 단체 휴업을 결의했다. 대구시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을 여러 차례 연장하면서 노래방들은 4월 19일까지 총 2개월간 점포 문을 닫았다. 4월 중순 긴급생계자금 덕분에 손님이 잠시 늘었지만, 높은 임차료를 충당하기엔 역부족었다. 결국 3, 4월 매출이 0원인 상황에서 점포 관리비를 내느라 적자에 허덕였다.

 

한두 팀 오던 손님은 지난 8월 전국적으로 확진자가 늘면서 다시 발길을 끊었다. 2월부터 현재까지 건물 임차료를 단 한 번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건물주가 임차료를 독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못 낸 임차료는 보증금에서 깎이고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택시 이용객이 줄면서 남편 벌이도 시원찮아 졌고, 생계와 가정 평화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벌이가 줄어든 탓에 꼬박꼬박 내던 생명보험에서 약관대출을 받아 썼고, 일부 보험은 해약해 중도해지 반환금을 받았다. 5월엔 정부의 코로나19 소상공인 대출 1천만원 받아 노래방 부대비용과 식재료 구입에 썼다.

 

지난 여름 도시가스 요금이라도 아끼려다 가족끼리 자주 다퉜다. "날씨도 더운데 왜 온수로 샤워해? 보일러 끄고 냉수로 씻어." "어떻게 찬물로만 씻어? 보일러 한번 안 켠다고 몇 푼이나 아낄 수 있어?"

나와 남편 모두 식비를 아끼려고 점심을 꼭 집에서 먹는다. 기름값도 아까워 걸어서 출퇴근한다. 새벽 퇴근길을 걸을 때마다 두렵고 쓸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26세 아들 대학 학비는 올해 처음 학자금대출을 받았다. 용돈도 올해 초부터 주지 못했다.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버는 게 기특하면서도 미안하다. 요즘은 스트레스를 이겨 내려 수면제를 먹고 자곤 한다.

 

80대 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딸 걱정이 크셨다.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일 때 "생활비에 보태라"며 50만원을 부쳐 주셨다. 서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하다못해 임차료만이라도 낼 수 있다면….' 가장 큰 걱정이다. 자영업자의 가장 큰 부담이 점포 임차료이지만 4월 1차 정부 긴급생계자금은 현금이 아닌 탓에 임차료로 내지 못했다. 노래방을 팔면 임차료 부담을 겪지 않겠지만 인수할 이도 없다. 1년은 버틸 수 있을까.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자꾸만 마음을 스친다.

 

기획탐사팀

 

※ 이 기사는 본지 기자가 대구에서 35년간 여행사를 운영해온 이한수(60) 대표, 6년차 늦깎이 취업준비생 배지연(30·가명) 씨, 6년 간 노래연습장을 운영해온 정귀자(58·가명)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1인칭 시점의 내러티브 저널리즘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