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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그림 같은 풍경, 보석 같은 휴식

[우리 동네 즐기기] 경남 함양 화림동 계곡 4대 정자
‘선비문화 탐방로’ 숲과 시골의 향기를 맡으며 걷는다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기도 했다. 곳곳에서는 코스모스 향기가 하늘거리고 있고, 성급한 잠자리는 서둘러 날갯짓을 시작했다.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복잡한 세상일에서 잠시 벗어나고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더위를 달래면서 가을의 풍류를 즐겨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갔다. 바로 경남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다.

 

남강 가운데 버티고 자리 잡은 거연정

단청 없는 무채색 작고 아담한 군자정

화려한 동호정·유원지 같은 농월정 등

80여 개의 정자·누각 ‘정자의 고장’

풍류 즐긴 조선시대 선비들 몰렸던 곳


 

 

■정자의 고장

 

함양은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유명해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몰린 고장이다. 정치에서 손을 뗀 학자들이 자연을 벗 삼아 인생과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선비들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음풍농월하며 세월을 보냈다 해서 함양을 ‘정자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함양에는 정자와 누각이 무려 80여 개나 있다. 특히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는 정자가 몰려 있다. 과거에는 ‘여덟 개 연못에 여덟 개 정자가 있다’는 뜻으로 화림동 계곡을 ‘팔담팔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덕유산에서 시작한 계곡 물줄기가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 ‘팔담팔정’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자가 많았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다수설이다.

 

지금 화림동 계곡에 남아 있는 정자는 네 곳이다.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과 2015년 복원된 농월정이다. 농월정은 원래 옛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2007년 방화로 사라졌다 복원됐다.

 

 

 

■군자정과 거연정

 

웅장한 바위 여러 개가 남강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눈을 부시게 만드는 하얀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바위 주변으로는 남강 물이 콸콸 흘러가고 있다. 화림동계곡에서 경치가 가장 좋기로 유명한 함양 서하면 봉전리 봉전마을의 거연정이다.

 

인조 18년(1640년)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서원을 세웠다. 그 옆에는 억새를 엮어 정자를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거연정이었다. 이후 전시서의 후손들이 철폐된 서원에서 나온 자재를 이용해 1872년 새 정자를 만들었다. 전시서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을 기리려는 뜻이었다.

 

거연정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이곳을 거쳐 간 선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를 남겼다. 그 중 조선후기 학자 임헌회가 〈고산문집〉의 ‘거연정기’에 남긴 시가 있다.

 

‘영남의 빼어난 경치는 삼동(三洞)이 최고로다. 삼동의 경승은 화림동이 최고이니, 화림동 경승은 거연정이 단연 으뜸이로구나.’

 

코로나19 때문인지 거연정에 올라갈 수 없게 줄을 쳐 놓았다. 정자에 올라가는 대신 바로 앞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의 바위는 편평한 너럭바위가 아니다. 수직절리로 생긴 울퉁불퉁한 바위다. 마음을 비우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이곳 이름이 왜 거연정인지 알 수 있다. 자연 속에서 그냥 눌러앉고 싶은 욕망이 가슴을 헤집고 나온다.

 

‘자연이 내게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노라. 길손이여! 발걸음을 멈추고 세상일을 잠시 잊어보는 게 어떠하리.’

 

거연정 바로 아래에는 군자정이 있다. 거리는 50m 정도다. 조선시대 학자인 정여창이 이곳의 처가를 방문할 때면 늘 들러 쉬던 곳이다. 군자정은 작고 아담하다. 단청은 전혀 없다. 무채색이다. 무뚝뚝하면서 호방한 남성의 기질이 느껴진다. 풍경도 훌륭하다. 매우 남성적이다. 거연정에서 흘러내려 온 물은 군자정 앞에서 거칠게 부서지고 흩어진다.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세상에 나아가는 군자를 상징하는 물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의 조화는 거연정에 미치지 못한다.

 


 

■동호정과 농월정

 

거연정, 군자정에서 2km 아래에 크고 화려한 정자가 보인다. 동호정이다. 임진왜란 때 장사였던 장만리를 추모하며 세운 정자다. 그의 호가 ‘동호’여서 동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등에 업고 수십 리 피난길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동호정 인근에서 살았다. 1890년 그의 후손들이 조상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본다. 60m 정도 되는 긴 너럭바위가 섬처럼 떠 있다. 차일암이다. ‘해를 가려주는 바위’라는 뜻이다. 선비들은 이 너럭바위에서 풍류를 즐겼다. 수십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크기다. 주변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동호정에 올라 잠시 누워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두 눈을 감기게 한다. 억지로 졸음을 참고 단아한 단청을 둘러본다. 주변 풍경보다 단청이 더 예쁘다. 정자는 꽤 넓다. 여럿이 앉아 놀이를 즐길 만하다.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 한 수 짓고, 술 한 잔 마시며 놀기에 좋았을 것 같다.

 

정자 누마루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시원한 초가을의 풍경이 담겨 있다. 깊은 산속에서 익어가는 알밤 향기도 실려 온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이 이렇게 타이른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마음을 비우고 한숨 자다 가거라.”

 

동호정에서 다시 3.5km 거리에 농월정이 있다. 인근에서 계곡이 가장 넓은데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어 농월정국민관광지로 조성된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덕에 이곳에는 식당, 카페도 적지 않다. 오토캠핑장도 있다.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과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 유원지 같은 느낌이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 때 학자 박명부가 지은 정자다. 그는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항의하면서 고향에 내려왔다. ‘농월(弄月)’은 ‘달과 함께 논다’는 뜻이다.

 

‘달 밝은 고요한 밤이로다. 강에 비친 달은 술잔이로구나. 시원한 술 한 잔을 부어 달과 함께 세월을 즐기리다.’

 

농월정교를 건너 숲길을 잠시 걷는다. 숲길 끝에 방대한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곳곳에는 오래전에 누군가 새긴 이름이 적혀 있다. 바위 한쪽 끝에 정자가 서 있다. 농월정이다. 정자에 올라가니 호쾌한 물줄기와 그 앞에 넓고 얕게 펼쳐진 바위가 시원해 보인다. 정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고,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가도 좋다. 무더운 여름이면 아예 물속에 풍덩 뛰어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곳에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네 정자가 자리 잡고 있는 남강 주변에는 시골 마을의 풍치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선비문화 탐방로’가 있다.

 

1구간은 군자정 인근 선비문화탐방관에서 봉천교를 건너 영귀정, 동호정을 거친 다음 호성 마을을 지나 농월정에 이르는 6km 코스다. 2구간은 농월정에서 구로정을 거쳐 오리숲까지 이어지는 4km 길이다.

 

굳이 전 구간을 다 걸을 필요는 없다. 차를 몰고 가다 걷고 싶은 구간만 골라 걸으면 된다. 숲길 향기를 맡고 싶으면 거연정 앞에 있는 봉천교를 건너 영귀정~다곡교까지 1km 구간을 왕복으로 걸으면 된다. 차를 거연정 인근에 세워놓고 산책하러 다녀온 뒤 남강으로 내려가 발을 잠시 담그면 된다.

 

시골 마을 풍경을 보고 싶으면 차를 몰고 호성 마을로 가면 된다. 이곳에서는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탐방객을 맞이한다. 과수원의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빨간 사과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늙은 호박도 이곳이 시골임을 알려준다.

 

다만 탐방로를 제대로 알려주는 안내판이 부족해 길을 잃거나 헤맬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아야 한다. 또 가끔 차들이 오가는 도로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