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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모내기 철만 되면 그날 죽음의 그림자가 목을 조여온다

5·18 40주년 주남 마을의 기억과 치유 <상> 40년의 아픔 간직한 마을
계엄군, 버스 무차별 총격
생존자 2명 뒷산 끌고가 사살
22명 주검 아직도 행방 묘연
암매장 등 진상규명 필요

 

40년의 세월 동안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 있다.

1980년 5월, 일주일 간 계엄군의 총칼에 짓밟힌 자연부락마을이지만,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곳이다. 민간인 집단학살과 암매장의 현장이자 행방불명자들을 찾기 위한 단서가 될 장소, 광주시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주남마을은 40년 동안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거나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긴 세월동안 스스로 아픔을 치유하고, 그 과정을 일상에 녹여 가고 있다.
 

광주일보는 올해 5·18항쟁 40주년을 맞아, ‘생활 속 5·18’과 ‘5·18의 일상화’로 전환해야 할 광주시민의 향후 10년을 주남마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인 7·11공수여단이 평화롭던 ‘주남마을’에 들이닥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계엄군의 시위대에 대한 살상과 폭력 진압에 광주 시민들이 대거 전남도청 앞에 모이자, 급파된 7·11공수여단은 21일 오후 1시 시민들에게 조준 사격을 시작했다. 집단 발포 이후 광주의 참상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7·11공수여단은 시 외곽으로 철수해 주남마을과 녹동마을에 주둔하면서 광주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1995년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1980년 5월 23일 오전 주남마을에 주둔해있던 11공수여단 계엄군이 광주시 동구 지원동 광주~화순 간 15번 국도를 지나가던 25인승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계엄군은 부상자 3명 중 2명(채수길·양민석씨로 판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 후 암매장했다. 일부 시신에선 대검에 찔린 흔적도 발견됐다.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여·당시 17세)씨는 다행히 헬기로 병원에 이송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 버스는 시신과 함께 강가에 추락시켜 이 사건을 단순 추락사고로 처리했다.
 

주남마을 야산에 암매장된 채씨의 주검은 일주일 뒤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다.

주남마을 버스총격사건은 1995년 검찰조사와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도 한건의 총격사건으로 결론지었지만, 이외에 유사 사건이 몇건 더 있다는 증언이 계속됐다.

5·18연구자들은 같은날 4건의 버스 총격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작성한 ‘작전상황일지’에는 ‘5월 23일 오후 3시30분 광주 소태 폭도 50명(버스 1대) 군부대 기습 기도. 군부대(11공수) 반격소탕. 생포 3명(부상 2명). 사살 17명’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유족과 주남마을 주민들은 마을 인근에서 다른 버스총격이 있었다는 증언을 내놓았으며, 2번의 버스 총격을 직접 확인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주남마을은 유력한 암매장 장소로도 꼽히는 곳이다. 피해자 총 33명 중 신원이 확인된 숫자는 11명에 불과하다. 생존자 홍금숙씨 1명과 10구(고영자·김남석·김윤수·김춘례·박현숙·백대환·양민석·장재철·채수길·황호걸 등)의 주검을 제외하면 22명의 주검은 아직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주남마을 버스총격사건은 전교사 상황일지 기록에 맞춰 사고 시간과 주검 숫자가 맞춰졌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향후 진상규명조사위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주남마을 주민들은 마을 주변에 주둔해있는 계엄군의 총소리와 탱크소리, 헬기소리에 집 안에서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집 밖으로 잠깐 나왔다 하면 계엄군의 총부리가 향해왔기 때문이다. 초파일 시기에 모내기가 한창 때였지만 농사준비는커녕 집 밖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목을 조여왔으며, 그 공포는 현재까지도 주민들을 억누르고 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