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박물관은 16일부터 새 단장을 마친 어린이체험실을 다시 공개한다. 새롭게 단장한 어린이체험실은 대표 유물인 집 모양 토기(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99호)와 새 모양 토기 등의 3D 입체 퍼즐 맞추기, 블록으로 집 짓기, 씨실·날실로 옷 짓기, 삼국 시대 밥상 차리기, 인터랙티브(interactive) 사냥놀이 게임, 삼국 시대 건물 스탬프로 마을 꾸미기 등으로 어린이들이 삼국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전래동화를 듣거나 그리기·색칠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비롯해 퍼즐·보드게임 등도 따로 마련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회차별 관람 인원과 이용 시간이 제한된다.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일일 운영 횟수는 총 8회로 회차별 이용 시간은 50분이다. 관람 인원은 회당 20명(보호자 포함)으로 제한된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사전 예약 또는 현장 접수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사전 예약은 정관박물관 누리집(http://museum.busan.go.kr/jeonggwan/index)에서 관람 희망일로부터 1일 전까지 접수해야 한다. 단, 현장 접수는 온라인 사전 예약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인 부산의 김동표 씨가 노환으로 10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은 1941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담양과 전주에서 컸다. 4남 1녀 중 4명이 우리 가락에 몸을 담았는데 작고한 첫째 형 김동준은 판소리고법 보유자였고, 역시 작고한 셋째 형 김동진은 대금을 불었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김향옥은 장구가 일품이다. 어릴 적부터 쟁쟁한 이들의 소리와 연주를 들으면서 자란 그는 김동준-조한종-편재준-강백천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대금을 익혔다. 국악이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 악사로 활동하면서 서울서 10년 이상 살다가 1970년부터 부산에 정착해 동래별장을 중심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35세 때 대금산조 보유자인 강백천 문하로 들어가 1993년에 보유자가 됐다. 그의 대금산조는 강백천류를 잇는 '시나위더늠 대금산조'로, 굿 음악인 시나위에서 가락을 가져와 슬프고 애달프다. 그는 후진 양성에도 힘써 3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해 한평생 대금산조의 보전과 전승 활동에 헌신했다. 그는 가짜소리 ‘발발성’을 경계하면서 “젓대(대금) 소리는 삶의 감칠맛으로 애달프게 깊어지는 ‘바바리성’이 제대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은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말, 갑옷을 입다’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신라와 가야,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 그리고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말 갑옷까지 고대의 말 갑옷 18점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은 전시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경주 황남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말 갑옷이 확인된 이후 신라, 가야, 백제 시대의 말 갑옷이 전국에서 여러 점 출토되었지만,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함안 마갑총, 2009년 경주 쪽샘지구 C10호에서 나온 완전한 형태의 말 갑옷이 고대 삼국의 말 갑옷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계기가 됐다.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했다. 1부 ‘신라 귀족들의 안식처, 쪽샘지구’에서는 쪽샘지구 C10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10년간의 보존 처리를 마친 말 갑옷과 재현품을 전시한다. ‘신라의 말 갑옷’을 주제로 황남동 109호와 계림로 1호에서 출토된 말 갑옷도 각각 1934년과 1973년에 발굴된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2부 ‘가야‧백제의 말 갑옷’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최대 수량을 자랑하는 가야의 말 갑옷을 소개한다. 함안 마갑총에서 나온 말
경주 남산 약사곡(약사골)에 있는 11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후기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의 머리(불두·佛頭)를 찾았다. 불두는 현재 이 불상이 놓인 곳에서 불과 10m 정도 떨어진 땅속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4일 “남산 약수곡(석조여래좌상절터) 제4사지 경역에 방치된 석불좌상을 보수 정비하기 위한 전 단계로, 좌상의 원 위치를 확인하고 주변을 정비하던 중 불상 머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불두의 미간 사이 백호를 장식했던 둥근 수정도 땅속에서 같이 발견됐다. 불두는 높이 50cm, 너비 35cm, 둘레 110cm에 이른다. 발굴 당시 불두는 땅속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얼굴 오른쪽과 오른쪽 귀 일부에서는 금박도 관찰됐다. 불두 주변에서는 모두 소형인 청동탑, 탄생불, 좌상 불상도 함께 출토되었다.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109cm, 어깨너비 81cm, 무릎너비 116cm로 일제강점기인 1941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주 남산의 불적>에서도 머리가 없는 모습이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측은 “불상의 목 부분과 불두 아랫부분을 석고를 떠서 맞춰보니 딱 맞아 떨어졌다”며 “이렇게 훼손 없이
부산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공동 주최로 6일부터 31일까지 ‘가야본성(本性)-칼과 현’ 특별전을 열고 있다. 1991년 가야사 복권을 선언한 중앙박물관의 ‘신비한 고대왕국 가야’전 이후 30년 가깝게 축적한 고고학과 역사학 성과를 집약한 전시다. 앞서 서울 중앙박물관에서 똑같은 이름의 특별전을 개막했을 때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코드에 맞춘 전시라느니, 전시물 한두 점을 두고는 역사 왜곡이라느니 따위의 과잉된 논란이 있었다. 가야사 자체가 여전히 비주류 주변부 역사로 머물고 있기에 나오는 논란일 것이다. 하지만 몇몇 문제 제기가 가야사 진면목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 취지 전체를 가릴 수는 없다. 부산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칼과 현’ 공동 특별전 가야사 연구 30년 성과 집약 국보·보물 등 2500점 전시 사전 예약제·VR 콘텐츠 제공 부산박물관 전시는 3달간의 중앙박물관 전시와 견줄 때 ‘같은 듯 다른 전시’다. 파사 석탑과 구지가를 소개한 초입의 신화 부분을 논란 때문에 다 덜어 내고(그러나 이게 아쉽다), 4가지 전시 주제(번영, 공존, 힘, 화합)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낙동강 하구역’에 더 집중하는 전시를 했
문화재청은 지난 4일 자로 ‘구 부산 나병원 기념비’(사진)를 국가 등록문화재 제781호로 지정했다. 이 비석은 지난 2월 6일 ‘부산 나병원 기념비’란 이름으로 등록 예고됐던 것으로, 1909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나병원인 ‘부산 나병원’의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1930년에 제작됐다. ‘구 부산 나병원’은 한국 근대사에서 한센병 환자만을 위해 최초로 세워진 병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를 기념하는 비석은 우리나라 특수 의료 영역인 한센인 치료의 역사와 선교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일반인과 격리돼 생활하던 한센인 환자들의 존재와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한 김주열 열사 사진 등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추진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4·19 혁명 60돌을 맞아 ‘혁명 문화유산’ 7건을 민주화 문화유산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추진한다”고 13일 밝혔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추진하는 7건은 △〈부산일보〉 김주열 열사 사진 △마산지역 학생일기 △고려대 4·19의거 부상 학생 기록물 △연세대 4월 혁명 연구반 수집 자료 △자유당 부정선거 자료 △이승만 사임서 △서울 동성고 학생 이병태의 일기 등이다. ‘김주열 열사 사진’은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에 특종 게재된 바 있다. 김주열 열사의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사진으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역사적 사진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사진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산지역 학생일기’는 1960년 3~4월 마산지역 상황을 적은 120여 쪽의 학생 일기로 현재 3·15의거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오는 17일부터 3·15 의거 발원지인 마산(현 경남 창원시) 시위 현장 등을 기록물과 함께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한국교육방송(EBS)에 7차례 방영하고 관련 학술대회와 특별전도 개최할 예정이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 ‘좌천동 역사 골목’으로 부를 만한 골목이 형성되고 있다. 이곳은 ‘정공단로’로 불리는, 일신기독병원이 있는 골목길이다. 이 골목은 근년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 확인으로 중요한 ‘하나의 방점’을 추가했다. 동구청은 지난 1월 ‘박재혁 의사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다. 박재혁 의사는 1920년 일제강점기 부산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터뜨린 의거의 주인공이다. 그동안 박재혁 의사 생가터는 자성대공원 옆(동구 범일동 550)으로 잘못 알려져 2012년 동구청이 그 근처 조방로에 ‘박재혁 거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족의 이의 제기와 이에 관한 연구와 고증으로 지난해 가구거리 공영주차장 자리(범일동 183)가 박 의사의 생가터로 재확인됐다. ‘박재혁 거리’를 조성하려면 이 골목이 더 적당한 것이다. 200m 남짓한 ‘정공단로’ 골목 임란·일제강점기·피란 유적 집약 최근 박재혁 의사 생가터도 확인 항일·근대 정신 담은 아우라 대단 200m가 넘는 이 골목의 역사적 아우라는 대단하다. 임진왜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부산역사와 관련한 주요한 장소 8곳이 집적돼 늘어서 있다. 골목 한가운데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정발 장군을 모신 정공단(부산시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가을여행)는 ‘한국의 유마 거사’로 일컬어진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의 첫 일대기다. 그의 제자 최운초(67) 씨가 8년 동안 조사하고 2년간 쓴 책이다. 50여 명의 도반 모임에서 그에게 백봉의 행장을 쓸 것을 일임했었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출간 제자 최운초가 기록한 일대기 일제강점기 사상범으로 옥살이 56세 때 ‘무(無)’ 화두로 깨친 뒤 “허공은 내 몸과 한가지” 일갈 부산서 거사불교 바람 일으켜 ‘말법시대의 등불’(탄허 스님)이라 불리던 백봉의 삶은 희한하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백봉은 아주 뒤늦은 1964년 56세 때 ‘무(無) 자’ 화두를 들고서 크게 깨쳤다고 한다. ‘너무 늦지 않았나, 그리고 화두를 든 지 6개월 만에 깨쳤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가 흔한가’라는 물음에 최운초 씨는 “백봉 같은 대선지식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몇 생의 공부를 거듭하신 분이라고 해야 한다. 늦게 불교에 들어간 것은 예정된 것으로 때가 되어 일어나신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과연 견성(見性) 이전 백봉의 삶은 고난으로 울퉁불퉁했다. 일제강점기, 부산제2상업학교 중퇴 후 부산청년동맹에 관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