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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부산 재가불교에 날개 단 백봉 김기추의 파란만장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가을여행)는 ‘한국의 유마 거사’로 일컬어진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의 첫 일대기다. 그의 제자 최운초(67) 씨가 8년 동안 조사하고 2년간 쓴 책이다. 50여 명의 도반 모임에서 그에게 백봉의 행장을 쓸 것을 일임했었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출간

제자 최운초가 기록한 일대기

일제강점기 사상범으로 옥살이

56세 때 ‘무(無)’ 화두로 깨친 뒤 

“허공은 내 몸과 한가지” 일갈 

부산서 거사불교 바람 일으켜 

 

‘말법시대의 등불’(탄허 스님)이라 불리던 백봉의 삶은 희한하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백봉은 아주 뒤늦은 1964년 56세 때 ‘무(無) 자’ 화두를 들고서 크게 깨쳤다고 한다.

 

‘너무 늦지 않았나, 그리고 화두를 든 지 6개월 만에 깨쳤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가 흔한가’라는 물음에 최운초 씨는 “백봉 같은 대선지식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몇 생의 공부를 거듭하신 분이라고 해야 한다. 늦게 불교에 들어간 것은 예정된 것으로 때가 되어 일어나신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과연 견성(見性) 이전 백봉의 삶은 고난으로 울퉁불퉁했다. 일제강점기, 부산제2상업학교 중퇴 후 부산청년동맹에 관계하다가 1930년대 사상범으로 부산과 만주에서 2차례 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건준 활동으로 미군정에 의해 또 옥살이를 한 뒤, 부산남중·남고 설립을 주도하고서 자유당에 입당해 정치계에 뛰어들었으나 4·19혁명 직후 부산을 도주하듯이 떠나야 했다. 

 

백봉은 서울·인천에서 ‘삶의 무상’을 느끼며 하릴없이 생활하던 중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그는 거짓말처럼 6개월 만에 벼락같이 깨쳤다. 참선 수행 중 ‘무(無) 자’ 화두에 ‘직심직불(直心直佛)’, 곧은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구절이 걸려든 다음,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그때 근처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백봉의 말이다. “허공이 있을 수가 없어, 나를 여의어서, 내가 없다면. 내가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벌어지는구나. 허공 전체가 내 집이라. 허공이 내 몸과 한가지라. 만물이 나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어. 결국 그렇게 부처님까지 올라가지. 내가 없는데 부처님이 있어?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하고 나하고는 뿌리가 하나라.” 이것이다. 백봉의 저 유명한 ‘허공으로서의 나’이다. 

 

그가 다시 부산에 온 것은 1972년이다. 깨달은 뒤 8년 뒤였다. 최 씨는 “스승은 〈금강경 강송〉과 〈유마경 강론〉으로 서울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하지만 대중은 잘 알지 못했다. 8년간 교화의 방편으로 다져지고 준비된 뒤 부산에 오신 것이었다”라고 했다. 이후 백봉은 1984년까지 12년간 부산에서 ‘이 땅에서의 가르침’을 깊게 펼쳤다. 백봉은 거사풍(居士風)을 일으켜 부산불교거사림을 태동시켰고, 부산 보림선원이 만들어져 사직동·남천동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불교는 승속, 출가와 재가의 양 날개가 필요한데 백봉이 다름아닌 부산서 ‘한국불교 재가의 날개’를 펼쳤다는 것이다.

 

“부산 불심의 밭은 참으로 기름졌다. 불교 인구 비중도 높았고 범어사 동산 스님, 해인사 효봉 스님 등 뛰어난 선사들이 일으킨 선풍이 있었다. 발심을 한 제자 20여 명이 백봉을 지극히 모시며 견처를 얻고 교화를 도왔다. 정영모(일제강점기 부산 사회운동가), 이점준, 진용선, 황정원(전 한국해양대 교수, 보림선원 부산선원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최 씨의 설명이다. 

 

‘백봉을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나’는 물음에 최 씨는 “그건 어렵다. 다만 세상을 사랑한 따뜻한 분이었다”라고 했다. 시대에 뛰어들고자 했던 젊은 시절 백봉의 삶은 그 가르침으로 또렷이 체화됐으며, 그래서 시대를 생각했던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백봉은 생의 나머지 1년을 지리산에서 마쳤다. 그는 설법을 매우 중시했다. 백봉은 300시간이 넘는, 유려하고 날카로운 음성 설법을 남겨 놓았다.

 

“이 육신은 자체성이 없다. 볼 줄 모르고 들을 줄 모른다. 보고 듣는 놈이 따로 있다. 바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다. 그것은 마치 허공과 같다. 그 허공을 알겠는가.”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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