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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예술 꿈나무들 무대…학생부터 지역민까지 함께한 대축제

호남예술제 70년 <2> 발자취
아동극·음악 등 5개 종목으로 시작
실용음악·만화·일러스트까지 신설
공설운동장 개막식 10만명 몰려
시가행진·불꽃놀이 등 시민축제로
80년엔 10월로 연기, 중단없이 진행

호남예술제의 70년은 예술 꿈나무들의 등용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클래식, 미술, 문학, 무용, 국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 넘치는 꿈나무들을 발굴해왔다.

 

1956년 6월 13일, 동방극장에서 열린 제1회 호남예술제는 지방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결선 날엔 극장 밖까지 관중이 몰리는 등 한마디로 시민축제의 장이었다.

 

2회부터는 부통령상이 신설되고, 각 분야 권위자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대회의 위상이 높아졌다. 특히 아동극 부문인 동극 경연은 지역 연극 발전의 토대가 됐다. 5회 대회에서는 중·고등부가 신설되며 행사의 외연이 확장됐다. 당시 보도는 ‘성인 못지않은 솜씨를 지닌 청소년들의 무대를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했다.

 

1961년 4·19 혁명 1주년을 기념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예정됐던 6회 대회는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6월에서 11월로 연기되며 격변의 시대를 함께 겪기도 했다.

 

8회 대회에 이르러 참가자는 4000여명에 달했고, 광주 도심을 가로지르는 시가행진과 함께 명실상부한 시민 축제로 자리 잡았다. 남원 농악대와 학강국민학교 밴드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전남여고 강당에서 출발한 행진은 충장로, 금남로를 거쳐 경연장을 향했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예술 꿈나무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10회 대회부터 농악, 판소리, 민요 등 전통 예술 장르가 대거 확장됐고, 15회 대회부터는 주부백일장, 가요 콩쿠르, 농악 경연, 가장행렬이 새롭게 도입됐다. 특히 광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이른 아침부터 약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각 학교에서 참여한 학생들은 화려한 분장과 퍼포먼스로 가장행렬을 채우며, 남녀노소가 하나 되는 추억을 만들어냈다.

 

16회 당시 개막식에 참석한 홍경모 문공부 차관은 축사에서 “호남예술제만큼 규모가 큰 지방 행사가 다른 지방에는 없으며, 이는 바로 호남인들의 높은 문화 수준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1회 대회에서는 1976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정경숙씨가 탄 오픈카를 선두로 한 가장행렬이 단연 화제였다. 특히 300여명이 참여한 광주수창국민학교팀 가장행렬이 눈길을 끌었다.

 

22회 대회는 석가탄신일과 겹쳐 불꽃놀이, 제등행렬이 함께 열리면서 흥겨운 축제의 장이 됐다. 제자들의 참가비를 마련해준 나주 양산국교 정영두 교사의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광주의 아픔이 자리한 1980년에도 호남예술제는 함께했다. 제25회 대회는 5월 개최 예정이었지만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연기돼 10월에 열렸다. 전남 농아학교 학생들이 초등부 군무 부문 장려상을 수상하며 깊은 감동을 선사했으며, 총 1만9천여 명이 참가했다.

 

다음 해인 1981년 제26회 대회부터는 광주일보 주최로 새롭게 출발했다. 당시 군사정권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옛 전남일보와 옛 전남매일이 통합되며 창간된 광주일보가 예술제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30회 때는 그간 배출한 예술 인재들을 조명하는 ‘정상의 얼굴들’ 초청공연을 개최했다. 김남윤 바이올리니스트, 서영화 피아니스트, 정애련 소프라노 등 정상급 예술가들이 광주시민회관 무대에 올라 예술제의 위상을 높였다.

 

31회 대회는 영광국민학교생 8명이 독창 부문 최고상 금, 은상을 휩쓸고 합창서도 금상을 수상해 화제를 낳았다. 영광국민학교는 32회 대회에서도 합창, 무용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21년만에 처음으로 지방 국민학교가 종합최고상을 가져가는 기록을 남겼다.

 

호남예술제는 청소년들의 관심사와 교육과정 등을 반영해 변화를 거듭했다. 41회 대회부터 일반인 부문을 폐지하고, 초·중·고등학생 중심의 경연으로 특화됐다. 이후 음악, 미술, 작문, 국악, 무용 등 5개 부문으로 고정되며 질적인 향상을 꾀했다. 청소년그룹사운드 페스티벌(50회), 논술 부문(51회)이 신설됐고, 같은 해 유아 대상의 ‘새싹 그리기 축제’도 시작돼 매년 천여 명의 유아들이 미래 예술가의 꿈을 펼쳤다.

 

55회는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선생 순국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광주뿐 아니라 그의 고향인 광양에서도 대회가 개최됐다. 56회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실용음악 부문과 만화·일러스트 분야가 신설돼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제로서의 외연을 다시 한 번 넓혔다. 62회 때는 광주일보 창사 65주년을 겸해 ‘정명화·손열음·신지아 트리오’ 기념공연이 펼쳐졌다. 호남예술제 출신으로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3위에 입상해 이름을 알린 신지아 바이올리니스트가 참여해 1600여명의 관객이 모이는 등 화제를 모았다.

 

호남예술제는 70년의 세월 속에서 수많은 예술 꿈나무들을 무대 위로 불러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국내외 예술계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루며 지역의 자긍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호남예술제는 새로운 세대의 재능을 밝혀주는 등불로서, 예술을 향한 설렘과 열망이 자라나는 무대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