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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원선의 힐링&여행] 파란 하늘 하얀 눈꽃…덕유산의 겨울

관광 곤돌라 타고 설천봉에 내려 20-40분 걸으면 주봉 향적봉 도착
등산로 따라 흰 눈 뒤집어 쓴 나목…눈 뗄 수 없을 정보도 환상적 자태

 

여명이 봉창에 깃들어 희뿌옇게 어리는 방안으로 뽀얀 입김이 서린다. 아랫목으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은 아버지께서 새벽 군불을 지피신 때문일 것이다. '딱딱' 삭정이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어험'하는 헛기침이 마당으로부터 인다. 새벽녘 소일이 얼추 끝났다는 신호치고는 의외로 밝다. 궁금증을 동반한 손이 마당으로 난 장지문을 여는데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다.

 

밤새 백설기가루를 듬뿍듬뿍 뿌린 천사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빗질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새로운 세상을 맞은 듯 바둑이가 덩실덩실 뛴다. 겨울의 낭만은 눈. 지난해는 한겨울이 다가도록 대구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눈다운 눈이 내리질 않고 있다. 어쭙잖은 시상이라도 떠올랐을까? 간밤 눈 소식을 접한 무주 덕유산으로 눈꽃여행을 떠난다.

 

◆덕유산 산행의 추억

 

소백산맥의 중심부에 솟아있는 덕유산은 해발 1,614m로 향적봉이 주봉이다. 향적봉과 남덕유산을 잇는 능선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능선을 따라 적상산·두문산·칠봉·삿갓봉·무룡산 등 높은 산들이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원당천은 계곡을 따라 흘러 무주구천동을 지나면서 절경을 이룬 뒤 금강의 너른 품에 안긴다. 덕유산은 한라산에 이어 남한에서 네번째로 높은 산답게 봄 철쭉, 여름 계곡, 가을 오색단풍, 겨울 설경의 아름다움과 산 곳곳에 산재된 유적지와 더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필자가 덕유산을 처음 접한 때는 1980년대 후반이다. 결혼한 이듬해 여름 피서지로 정한 때문이다. 대구의 날씨가 불볕더위라 밤을 위한 준비나 대책도 없이 찾았다. 밤새 산골의 냉기로 텐트 안에서 오들오들 떨다가는 잠을 깼다. 김치를 넣어 보글보글 끓는 꽁치통조림찌개로 추위를 몰아낸 뒤 산을 올랐다. 달랑 물 한 통을 들고 가볍게 올랐다. 백련사까지만 한 것이 정상을 향해 내쳐 오른 추억이 있다.

 

두번째 겨울 덕유산 산행은 완전무장이다.무주구천동 삼공매표소에서 향적봉까지는 약 7km남짓한 거리다. 백련사까지의 약 4Km는 임도라 무난하다. 문제는 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다. 백련사 뒤편으로 오르든 오수자굴을 통해서 오르든 힘든 산행은 필연이다.

 

꾸역꾸역 향적봉인 정상을 눈앞에 둔 때는 거의가 파김치 수준이다. 헌데 지친 눈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 남성 등산객이 슈트의 정장차림에 넥타이까지 매었다. 한손에 양산을 받쳐 든 해반주그레한 여성들은 미니스커트차림에 하이힐을 싣고는 한껏 맵시를 뽐낸다. 어렵고 힘들게 오른 우리 일행들은 일순간 멘탈이 붕괴되어 바보가 된 느낌이다. 이유는 곧장 밝혀졌다. 향적봉에서 설천봉을 굽어보자 못 보던 시설물이 눈에 드는데 관광곤돌라다.

 

 

◆ 주목에 핀 눈꽃,환상적

 

이번 덕유산 겨울 눈꽃 여행은 관광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오르자 하늘은 온통 에메랄드빛이다. 행운의 날이다. 과거의 어느 때는 장사진의 긴 줄의 끝을 바투 잡고 바들바들 떤 끝에 어렵게 올랐지만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질 않았던가? 눈보라가 앞을 가로막고 동장군의 시퍼런 서슬 앞에 굴하지 않았던가? 고산이 갖는 변덕에 항복을 선언한 그때가 오늘을 위한 선물보따리만 같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약 20~30여분이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꿈속 같은 설경속이라 시간이 한정 없다.

 

고개를 들자 겨울 속 나목이 눈꽃을 줄줄이 매단 위에 상고대를 올려서 치장이다. 에메랄드빛 빙판 위를 어지럽게 금을 그은 듯하고 상감청자를 빙 둘러서 오밀조밀하게 가라진 틈새 같다. 바위라고 별수 있으랴 상고대가 달라붙어서 나는 어때요? 한껏 뽐내고 있다. 오리내리는 관광객들마다 복 받은 날이라며 휴대폰 앵글을 이곳저곳에 맞추며 지나간다.

 

 

향적봉에 오른 일행은 내처 중봉으로 향한다. 향적봉에서 중봉까지는 약 1Km남짓 하다.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걷는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주목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는 세찬 겨울바람 속에 꿋꿋하게 섰다. 주목은 높은 산에서 자라는 상록침엽교목이다. 높이가 17m에 달하며 수간은 적갈색으로 입은 선형이다. 덕유산 주목은 단단하여 옛날 암행어사가 차고 다니는 마패로 쓰였다고 한다.

 

덕유산에는 300~500년생의 주목이 약 1,000여 그루 자생하며 지방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적갈색의 수간에 곱게 내려앉은 눈꽃이 유명화가의 그림 같다. 그중에는 죽은 나무도 더러 있어 수간과 가지 끝에 깃 든 눈꽃조차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은 향적봉대피소가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하룻밤 묵어갈 수만 있다면 일몰과 일출의 화려한 장관에 목말라 하지는 않았으리라!

 

 

◆오수자굴 역고드름

 

중봉에 이르자 확 트인 시야를 시샘하는 듯 산바람과 골바람이 뒤엉켜 장난이 아니다. 반면 눈 속에 옹송그린 관목이 바다 밑에서 자라는 산호초와도 같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곳에서 바다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비록 전망대는 바람의 심술이 심하다지만 한발만 내려서면 천국이 따로 없다. 눈을 가리는 것이 없을 만큼 바라보아도 끝이 없이 장쾌하게 펼쳐진 능선이 호연지기를 불러 온다. 오른쪽으로 구불구불 뻗어 내린 등산로는 안성매표소와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이다. 반면 왼쪽을 택하면 오수자굴을 지나 백련사, 무주구천동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이 한창인 때에 오수자굴에는 역고드름이 자란다. 조그마한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얼어붙어 생긴 고드름이다. 옛날 오수자란 사람이 이곳에서 도를 닦아다는데서 붙여진 오수자굴은 백련사를 못미처 왼쪽으로 난 자드락길 막장에 있다. 워낙에 깊은 곳에 있다 보니 한겨울 노루궁둥이 만한 햇살마저 반 토막으로 찾아드는 곳이다. 이곳에 들면 오로지 자연의 소리만 들린다. 바람마저 잠들어 더없이 평안한 곳이다. 선인들이 도를 들먹일만한 곳이다.

 

일행은 왔던 길을 되돌아 설천봉으로 향한다. 6~8월경이면 덕유평전을 노랗게 물들이는 원추리군락지도 하얀 눈 속에 깃들어 긴긴 겨울잠에 빠졌다. 백마 탄 왕자는 언제 오나요? 하얗게 엎드려 있다. 반면 아고산대라 그런지 살을 에는 바람이 등을 떠밀다가는 생뚱맞게 어깨 위로 손을 걸쳐 친구를 하잔다. 쌩쌩 울어 보채는 등쌀에 못 이겨 에메랄드빛 하늘로 눈꽃이 난분분 흩날린다.

 

 

간혹 길을 잃어 얼굴로 손등으로 내려않는데 가슴속까지 시리다. 그 와중에 하얀색 한복도 곱게, 한껏 차려입은 관광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빨간색 복주머니까지 준비한 걸로 보아 설경을 제대로 즐길 작정인 듯 보였다. 양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붉어져도 마냥 좋단다. 말로만 듣던 덕유산의 설경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다며 포즈를 취한다. 세찬바람이 아름다움을 시샘이라도 한 듯 머리카락을 흩날리지만 아랑곳 않는다.

 

새하얀 눈 속에 하얀색 한복이 깃들어 유난히 아름다웠던 덕유산이다. 눈보라의 시샘이 최면에 걸린 듯 까무룩 잠들었기에 더 없이 즐거웠던 덕유산의 눈꽃 여행이다. 대구에는 언제나 눈이 내릴까? 선녀님들은 어느 날 어느 때 눈꽃가루를 선물처럼 펑펑 뿌려줄까? 이 겨울이 다가기전에 도심 가득히 눈이 내려 너나 없는 시민들이 겨울 낭만에 흠뻑 젖었으면 좋겠다. '코로나19'라는 몹쓸 병원균을 뒤덮어 깨끗하게 씻어 내렸으면 좋겠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