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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문화, 역사를 말하다·(7)] 용인의 역사와 함께한 '자연농원'

근대화의 주역들 땀과 열정으로 황토위에 쌓아올린 꿈과 동심의 세계

 

1974년 용인시의 산림 450만평(약 1천487만여㎡)에 대대적인 개발이 이뤄진다. 국토개발의 시범장으로도 불렸던 이 사업은 "쓸모없이 방치된 황토(荒土)를 황금의 옥토(沃土)로 탈바꿈시켰다"며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땀'과 '정열'로 심어진 개발 사례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유실수 단지와 종합양묘장, 양돈단지, 양어저수지, 과수 공원, 동·식물원과 어린이 동산 등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농원인 '용인자연농원'의 이야기다.

 

지금은 '에버랜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자연농원은 우리나라의 레저·관광·여가 문화의 발전과 역사뿐 아니라, 1970년대 개발이 이뤄진 용인지역과 주민들의 역사와도 긴밀하게 엮여있다.

 

 

개발의 시대, 용인자연농원의 도전

 

자연농원이 세워진 옛 가실리와 유운리, 신원리 등에 이르는 지역은 넓은 산야와 농지로 이뤄져 주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정부와 기업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추진으로 주민들은 이주했고 대규모 개발공사가 시작됐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동네 형들이 '개발간다'는 표현을 썼다. 산을 정돈하고, 나무를 심고, 벽돌을 나르고, 가래질하는 등 일종의 직장처럼 그곳에서 일하며 수입을 얻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옛 가실리·유운리·신원리 일대 조성
전국서 일꾼 "동네 형들 개발간다 말해"
"농사꾼들도 농번기 짭짤한 돈벌이"

 

농업만이 생계 수단이었던 이들에게 개발은 새로운 수입원이었고, 용인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일꾼들로 이 일대가 붐비기 시작했다.

용인문화원의 포곡면지에는 당시 인근 주민들이 "저녁때가 되면 막걸리 한집에 줄 선 사람들이 엄청났다"거나 "농사꾼들도 농번기에 막일로 가담해 짭짤한 돈벌이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자연농원이 개장을 앞둔 시기 경인일보(당시 제호 경기신문)에서도 자연농원의 개발과 그 결과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토질이 척박한 고지대에는 소나무 대신 경제성이 높은 잣나무와 오동나무를, 토질이 좋은 곳에는 은행나무, 밤나무 등 소득이 많은 유실수를 심었다. 세계 각국의 진귀 화목과 조경용 수목을 수집 번식시험 할 수 있는 묘포장, 농가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양돈단지, 식용잉어와 붕어를 양식하는 양어저수지도 만들어졌다.

또 자연식물원과 동물원, 어린이 동산으로 꾸며진 패밀리랜드가 중앙에 위치했다.

신문에는 "맹수들이 방목되어 있는 맹수사를 특수 관광차를 타고 관람할 때 차창으로 뛰어들려는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몸을 움츠리게 된다"라던지 "화려한 공작새의 공중쇼와 멧돼지의 곡예, 후라밍고 쇼 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희한한 동물쇼가 펼쳐진다"고 적혀있다.

어린이 동산의 제트열차, 아라비아 요술집 등 20여 가지의 기이한 각종 놀이시설에 대한 설명도 눈길을 끈다.
 

풍요의 시대 알린 자연농원

 

1976년 4월18일. 자연농원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첫날 2만5천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버스와 승용차,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은 물론 걸어서 자연농원을 찾은 사람들도 상당했다. 자연농원으로 가는 외길은 주말이면 차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처럼 자연농원은 전국에 있는 사람들을 용인으로 오라 손짓했다.

 

 

당시 저렴한 입장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국민들이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휴식과 즐거움 등을 제공하는 레저문화가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역의 대규모 개발 위에 세워진 자연농원은 지역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양돈농장은 자연농원 인근 마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6년 일반 공개 첫날 2만5천명 몰려
적지 않은 입장료에도 전국서 발길
새끼돼지 무상 분양, 농가소득 기여도
"용인은 몰라도 자연농원은 알았죠"
새로운 가족 놀이문화… 지역가치 높여

 

1974년 마을의 이장을 맡았던 이진원(76)씨는 지금도 새끼돼지를 무상으로 분양받았던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심을 얻기 위해 돼지를 나눠줬을 것"이라고 말한 이씨는 "자연농원에서 희망하는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돼지 600두를 나눠줘 각 마을로 전달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좋은 종자의 돼지를 주고 사료도 외상으로 주며 농가 소득 증대사업으로 계약 사육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또 "이후 돼짓값이 오르면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신원리와 유운리 일대에 양돈농가가 활성화됐다"며 "집집이 얼마나 양돈농가가 많았으면 마을만 지나가면 냄새가 나고, 파리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소득을 안겨준 양돈업은 폐수 문제 등으로 인해 지역의 자연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기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토록 맑았던 경안천이 오염되고, 오늘날 다시 살아나기까지 많은 이들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과거를 지나 미래로

 

"그때는 용인에 산다고 하면 어딘지 몰라요. 그러면 자연농원에서 왔다고 했죠. 자연농원은 다 알았으니까."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농촌개량화 사업, 각종 기업과 자연농원의 입주로 지역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농업이 주를 이루던 경제구조는 변화를 겪었고, 인구도 증가했다.

지역의 높은 물가와 땅값, 교통체증, 빈약한 상거래 등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여전한 반면,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이름을 알리는 데 있어 자연농원이 큰 기여를 한 부분 또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연농원의 개발과 성장은 좋은 면이든, 좋지 않은 면이든 지역의 역사와 함께하며 많은 부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용인자연농원은 특별한 놀 거리와 즐길 거리가 없던 1970년대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족 놀이문화를 선보였다. 밖으로 놀러 나온 가족과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자연과 휴식의 공간이자 꿈과 동심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후 레저기능을 더욱 강화한 자연농원은 1980년대에는 장미축제와 야간개장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며 새로운 여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 잡으며 여가·레저문화 발전에 한 획을 그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김장환 사무국장은 "자연농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과도기적 과정을 거쳤지만 용인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며 "앞으로 자연농원(에버랜드)이 갖는 지역성과 인문학적 의미를 최대한 살리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지역과 상생하며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고민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