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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보물로 '신분 상승한' 조선 관아, 경기도엔 어떤 곳이 있을까

 

 

조선 시대 정무를 보던 공간인 관아(官衙) 건축물 8건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화재청은 지난해부터 관아 건축물 120여 건을 검토해 최종적으로 8건을 보물 후보로 올렸는데,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관아 문화재 가운데서 경기도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3건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또 한 번 인정받은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연무관, 안성 객사 정청은 과연 어떤 곳인지 소개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장대는 전쟁이나 군사훈련 때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보통 성내에서 주변을 관망하기에 수월하고 넓은 대지가 있어 군사훈련을 하기 편한 곳에 건립된다. 전시에는 지휘소의 역할을 하지만, 일부 장대는 평상시에 성곽 관리와 행정 기능도 수행했다.

남한산성에는 1624년(인조2년) 축성할 때 동·서·남·북 4개의 장대를 두었고, 1686년 봉암성을 축성할 때 외동 장대를 설치해 총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로 산성 내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 2개가 나란히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했다.

수어장대는 복원한 경우를 포함한 국내 장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조물이다. 애초 단층 누각으로 지어졌다가 1751년(영조 27년) 2층으로 증축됐는데, 1836년 개건한 이후 1994년 연목이상 해체보수와 기와공사 외에는 크게 보수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초석, 바닥과 마루 가구형식, 기둥 형태 등 건축 초기의 모습 그대로를 갖추고 있어 19세기 장대의 표준적 가구 형식과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인조부터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일을 잊지 않고 기억했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남한산성 연무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연무관은 중앙군인 수어영의 군사시설로서 군사훈련이나 행사, 무사 시험 등이 치러지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직접 거둥하여 문무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새로 개발된 무기의 시연을 지켜보았으며, 음식을 마련하여 장졸들을 치하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조의 남한산성 행차 당시 백성의 숙원을 해결해 주었던 애민정신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1625년에 창건돼 그다음 해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조선 시대 오군영의 하나)의 중심 건물로, 1795년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됐다. 연병장을 바라보는 높은 위치에 건립한 연무관은 정면 5칸, 옆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중앙부에서 기둥을 뒷면으로 이주하고 벽을 세워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연무관은 건축 이후 한 번도 화재를 겪지 않고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중요 목조건축이다. 특히 2019년 부재 연륜연대 분석을 통해 창건 초기의 부재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된 조선 시대 관아 건축물이다. 이와 함께 수어청과 관련된 직접적 시설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화재로 그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안성 객사 정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안성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왕을 직접 만나기 어려운 지방의 관리 등이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객사 양쪽의 동·서익헌 건물은 많은 축소와 변형을 겪어 이번에는 정청(正廳)만 보물로 지정된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이곳은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건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 지방기와를 바꿨다. 원래 읍내의 관아 주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1908년 객사와 동·서익헌이 공립안성보통학교의 교사로 사용됐다. 이후 1932년 옮겨져 군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46년부터는 안성 명륜여자중학교 교사로 사용됐다. 학교의 확장공사를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객사는 다행히도 1995년 전면 해체 수리돼 현재 보개면으로 옮겨 복원됐다.

정청은 임금을 향해 예를 행하던 공간으로 바닥에 전돌이 깔려있고, 양쪽의 익헌보다 높게 지어져 있다. 정청의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 맞추어 댄 나무 부재) 형태와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과 비슷하면서도 살미(전통적인 목조건축물에서 사용되는 부재)와 살미 사이에 장식재와 같은 동그란 부재를 깎아 놓은 특징이 있다. 공포에 이런 모습이 남겨진 건물은 안성 객사 정청이 유일하다.

대들보와 종보는 고려 후기 건축물의 특징인 항아리형 보를 사용하고,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로 현존하는 객사 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19년 10월 15일, 안성 객사 앞 장미 몇 그루에 꽃이 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보통 봄쯤에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장미가 그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또 앞서 1417년 경기관찰사가 할머니 무덤에 쓸 돌을 구해달라고 하자, 당시 안성 군수가 안성 객사의 계단석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