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강릉 25.4℃
  • 맑음서울 23.3℃
  • 맑음인천 19.1℃
  • 구름많음원주 23.7℃
  • 구름조금수원 22.1℃
  • 맑음청주 25.3℃
  • 구름조금대전 24.6℃
  • 맑음포항 27.0℃
  • 맑음대구 26.3℃
  • 맑음전주 24.7℃
  • 구름조금울산 22.8℃
  • 구름조금창원 20.9℃
  • 맑음광주 22.9℃
  • 구름많음부산 21.0℃
  • 맑음순천 21.7℃
  • 구름조금홍성(예) 21.6℃
  • 맑음제주 21.5℃
  • 맑음김해시 21.7℃
  • 맑음구미 25.6℃
기상청 제공
메뉴

(전북일보) [전북사의 과제] ④에필로그

 

 

1주일간 연재했던 전북사가 종결했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되짚어보면, 후백제 왕도인 전주에 대한 문헌기록과 유물유적, 고조선 준왕이 금마(익산)로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마한사, 남원·장수지역에서 확인된 봉수와 제철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야사를 소략한대로 짚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전북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백제사를 비롯 각 역사별로 보완해야 할 점을 제언한다.

 
백제사

전북의 백제사는 다른 시기 역사보다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관세음응험기> 등 문헌사료에 익산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등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와 왕궁리 유적은 익산이 왕도로서 존재했다는 데 힘을 보태준다. 삼국사기에는 ‘익산에 있던 궁궐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고, 왕궁리 유적 내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지칭한 명문이 있다.

이를 두고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천도설’과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별부설 등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익산이 백제 무왕대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해석은 연구자들끼리 일치한다.

앞서 지난 2015년에는 왕궁리 유적 주변이 시가지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남쪽 1.3㎞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왕궁리와 제석사지 사이, 궁 남쪽의 탐리마을에서는 기와편, 건물터 등 생활유적도 확인됐다.

백제 왕도로서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도성체계’라는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왕궁리 유적은 궁성, 미륵사는 국찰, 쌍릉은 왕릉 등으로 비정하고 고고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익산에 산재한 유적은 동시대의 것들로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야 익산도성 본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고 했다.

 
후백제사


전주가 후백제 왕도로서 갖는 역사적 정체성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는 후백제왕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등 각지에서 산성유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대부분 유적이 땅속에 매장된 상태로 성격규명이 미진한 상태다. 후삼국 시대에 존재했던 왕조의 수도인 만큼 도성, 궁성, 분묘, 사찰, 생산시설 등을 세분화해서 발굴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며 ”여러 시설의 위치를 연계하면서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한사

마한사는 중국 문헌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등에 집단의 존재가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등 호남지역 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발굴에 매진한 결과, 마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토기, 분구묘, 동검, 유리구슬 등 다수의 유물을 발굴했다. 그 결과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했으며, 소국 11개~12개 정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도 밝혀냈다.

다만 기존 유물·유적 발굴과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한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사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깨고 전북 동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존재했다고 이론을 세운 점을 두고는 학계에서 평가가 긍정적이다. 가야로 통칭하는 각국에 대한 분석에서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을 간과했던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근거로 쓰이는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보완·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사료 자체로 문제점이 제기된 <일본서기>의 해석문제를 두고는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세희 saehee0127@jj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