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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율곡에게 길을 묻다]유년기 보낸 강릉부터 금강산·서울·파주·해주까지 … 동서남북 누비며 나라 걱정

 

율곡 선생의 삶이 펼쳐졌던 주된 공간은 크게 4곳이다.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인생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찾았던 강릉과 본가가 있던 서울, 집안의 터전인 파주, 처가가 있는 해주가 그곳이다.

1536년 12월26일(음력) 강릉 오죽헌 몽룡실에서 출생한 율곡 선생이 6세가 되던 1541년 서울 시가(媤家)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가 물려준 수진방(지금 수송동과 청진동 사이)에 정착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의 어려움으로 8세 때인 1543년 집안의 터전이었던 파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된다.

1551년. 율곡 선생이 16세가 되면서 수운판관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강(지금의 마포)에 이르러 어머니 신사임당의 별세 소식을 접했고 파주의 어머니 묘소에서 3년상을 치른 뒤 1554년 19세의 나이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한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20세가 되던 1555년 봄, 금강산에서 나와 강릉 외가에 머물며 유학자의 길을 가겠노라 결심하고 그 유명한 '자경문'을 짓게 된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1557년 성주로 내려가 성주목사로 있던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결혼을 하고 다시 율곡 선생은 성주에서 강릉으로 향한다. 외할머니께 곡산 노씨를 선뵈러 가는 길이었다. 1558년 강릉으로 가는 길에 율곡 선생은 안동 도산에 들러 퇴계 이황 선생을 만난다.

이후 과거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며 학문의 길을 닦았던 율곡 선생은 29세였던 15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호조좌랑으로 벼슬생활을 시작했고 다시 33세가 되던 1568년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강릉으로 내려갔으며, 이듬해 다시 강릉으로 와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1570년 병을 구실로 벼슬을 사직, 처가가 있는 해주로 내려간 뒤 서울과 파주를 오가며 몇 년간 벼슬길의 부임과 사직을 거듭한 율곡 선생은 41세 되던 1576년 해주 석담에 거처를 정하고 이듬해 가족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은병정사를 짓는다.

1578년 대사간을 시작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주요 요직을 거치며 1584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서울에 머물며 국가 경영에 매진했다. 율곡 선생은 1584년 1월16일 서울 대사동 집에서 별세했고 이어 3월20일 파주 자운산에 있는 선영에 묻혔다.

김경호 전남대 교수는 “조선의 동쪽 끝 강릉에서 태어나 서쪽 끝 파주에 정착하고 다시 남쪽인 성주에서 결혼해 처가가 있는 해주에 정착한 그는 동서남북을 누비며 나라를 걱정하고 붕당을 경계했으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 경장과 통합을 주창한 외로운 천재였다”고 평한다.

율곡 선생의 일생을 잠깐 되짚어 봤다. 앞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율곡의 길을 한 발한 발 쫓아 본다.

강릉=조상원기자 jsw0724@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