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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찾아서] ③유년의 기억

 

◆고향 군위 용대리

 

추기경의 마음속 고향은 군위 용대리였다. 대구는 태어나 학교(소신학교)도 다니고 사제로 첫발을 내디딘 곳이지만 아련한 고향의 추억은 군위보다 못했다. 다섯 살에 옮겨가 보통(초등)학교 5학년까지 지낸 용대리는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나를 길러 준 그리운 고향이었다. 애창곡 '향수'의 구절처럼 추기경에게 군위는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고향이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각별했다. '내 강아지' 하며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던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의 등에 기대 잠들곤 했던 기억을 따라가면 군위 옛 집이 떠올랐다. 한방 쓰던 동한 형의 따사롭던 맘 씀씀이도 또렷하게 남았다. 추기경의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아버지는 몇 해 못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래도 두 아들이 가난한 티를 내지 않도록 잘 먹이고 깨끗이 입혔다. 학교가면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 잘못한 일에는 엄했다.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먹지 말라고 가르치며 키웠다.

 

어린 시절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점포에 취직해 대여섯 해 다니다 내 점포를 열고 싶었다. 예쁜 색시와 결혼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자 했다. 떠돌이 행상의 철없는 아들 생각에 점포를 열면 큰 돈을 벌 것 같았다. 돈 벌어 어머니에게 인삼을 달여 드리고 싶다는 게 코흘리개 시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 군위보통학교

 

등굣길은 십리가 넘었다. 버들피리를 불며 오가기도 했다. 남학생 여학생 반이 따로 있었지만 저학년 때는 여학생 반에서 공부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순한아'로 불릴 만치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얌전한 때문이었다. 고학년에 올라가자 한반에 장가든 학생이 열이 넘었고 아들과 함께 다니는 아저씨도 있었다. 공부를 잘한 기억보다는 성적표를 받으면 어머니에게 미안했다는 기억이 더 많았다. 선생님이 장래 소망을 발표하게 했다. 신부님이 가르쳐 준 말이 생각났다.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공부합니다." 아이들이 수군댔다. "하느님, 신부님이 누구야?"

 

추기경 시절인 1993년 봄, 고향 나들이를 했다. 추기경 이야기를 연재하려던 소년 한국일보사가 주선했다. 고인이 된 정채봉 작가와 김병규 기자가 제안했다. 안동본당 신부 시절 대구를 오가던 길에 버스가 군위정류장에 서면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떠난 지 59년만의 고향 나들이였다. '오세암'을 쓴 정 작가는 뒷날 추기경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자 했다. 추기경이 반대했다. 위인전에 나올 만치 아름답게 살지 못했다며 거절했다. 책은 추기경 선종 이후 '바보 별님'으로, 다시 '저 산 너머'로 출간됐다. 동행한 둘은 추기경의 고향 나들이를 기록했다.

 

군위국민(초등)학교는 옛 모습이 아니었다. 전쟁 통에 교사도 불탔고 학적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는 꼬맹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단에 선 추기경은 어릴 적 학생으로 돌아갔다. "청소할 때 나이 많은 여학생이 물 떠 오라면 물 떠오고, 걸레 가져오라면 걸레 가져오고 하다가 가끔은 얻어맞기도 했지. 구구단을 못 외워 벌을 선 날 밤, 또 벌을 설까 무서워 꿈속에서 구구단을 몽땅 외웠지"라고 했다. 추기경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에 아이들은 웃고 재잘대며 즐거워했다.

 

당부도 빼먹지 않았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돼달라고 했다. 떠나는 추기경을 아이들이 매달리며 둘러쌌다. 그 속에 서 있는 추기경의 행복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추기경은 10년 뒤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만득이가 삶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기차를 타게 됐다는 겁니다. 한참을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 하는 겁니다."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어른의 무겁고 경건한 말씀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가끔은 일상의 가벼운 말이 더 가슴속 깊이 다가올 때가 있다. 유머로도 사람들이 알아주던 추기경이었다.

 

 

◆군위성당

 

점심은 신자들이 군위성당에 마련했다. 점심 자리에서도 웃음판이 이어졌다. 추기경은 장사꾼의 꿈을 포기하고 신부가 된 건 어머니의 권유였다고 했다. 그러나 동한 형과 달리 추기경은 어머니의 권유가 싫었다고 털어놓았다. 형은 그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했지만 자신은 새신부와 맞절하는 모습이 먼저 떠올라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당 마당에선 또 난리가 났다. 너도나도 사진을 찍자며 졸랐다. 떠나는 추기경에게 신자들이 배웅 인사를 했다. "신부님 또 오세요."

 

군위성당은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오솔길을 두고는 향교와 유림회관이 버티고 있고 교회도 이웃해 있다. 서로 소중하게 여기며 같이 사는 종교타운이라고 부를 만하다. 군위성당은 왜관본당에서 분리돼 세워졌다. 신나무골에서 가실성당으로, 가실성당에서 다시 왜관성당으로 흐른 전교의 맥이 이어졌다.

 

오솔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넓혀졌지만 여전히 옛 정취가 대단하다. 성당 마당에 서보면 사람들이 명당으로 꼽는 까닭을 알 만하다. 마당 가장자리 나무 탁자에서 커피를 대접하는 신부님의 맑은 눈이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부른다. 가을이면 '단풍 낙엽 음악회'가 열린다. 군위 사람들의 소중하고 즐거운 잔치다.

 

 

◆용대리 옛집

 

용대리 삼거리에서 추기경은 긴가민가했다. 읍내와 의성을 잇는 길은 포장길로 변했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천주교 공원묘지 이정표가 걸렸다. 옹기 가마터는 보이지 않았고 기와집에 슬레이트집이 초가를 대신했다. 비탈길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가니 허름한 기와집에서 쉰줄의 집 주인이 추기경 일행을 맞았다. 살던 집이 아니었다. 집 주인이 뒷마당으로 앞장섰다. 폐가 한 채가 힘겹게 서 있었다. 60년 시간이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어 그대로야, 바로 이 집이야."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 옛날 그대로였다. 부엌과 방 두 칸에 작은 툇마루. 창고로 쓴 탓인지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으로 고개를 들이민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네." 옹색하고 초라한 방은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작은 방에는 두고 온 연필이나 구슬, 딱지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무쇠 솥이 걸린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밥 익는 냄새가 툇마루에 앉은 추기경에게 풍겨왔다.

 

 

어머니는 이 집에 신부님을 모셔와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이 오는 날은 잔치 날이었다. 풀을 쑤고 창호지와 벽지를 새로 발랐다. 툇마루 밑까지 쓸어냈다. 조랑말을 타고 온 신부님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엎드려 절했다. 밥상엔 구경도 못한 반찬이 올랐다. 남긴 것을 얻어먹는 즐거움도 컸다. 생일보다 나았다.

 

동한 형의 친구라는 노인이 찾아왔다. 구부정한 허리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두 손을 맞잡은 노인은 "내가 니 형 동한이 친구다"고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추기경은 깍듯했고 노인은 반말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노인이 안부를 물었다. "참, 니 서울 가서 천주굔가 어디서 되게 출세했다며." 중국 선종의 황금시대를 연 마조가 시를 남겼다. '고향에 가지마라. 개울가의 할미 여전히 내 옛 이름을 부르네.' 추기경과 함께한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마음의 행로 끄트머리 고향에 추기경은 옛날의 '순한아'로 남아 있었다.

 

〈서영관 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