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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환상적인 숲길 속 숨은 별이 흐르는 골짜기

(140)관개수로 개척사
천제연 연못에서 발원된 베릿내
채구석, 온도 차로 바위 뚫는 등
3년 걸친 노력 끝 관개수로 개척
주민들 논농사 지어 쌀 생산해

 

▲천제연의 숨은 명소 ‘베릿내 관개수로 유적(星川沓灌漑水路遺跡)’

천제연 계곡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언덕을 베릿내 오름이라 부른다. 성천봉(星川峰)이라고도 부르는 오름 이름의 베릿내는 ‘별이 내리는 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제주어이다.

천제연 골짜기를 흐르는 폭포수가 마치 은하수처럼 흘러 바다에 이른다 하여 베릿내로 불리게 되었다 전한다. 베릿내의 발원지인 천제연의 맑고 깊은 연못을 보고나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성천봉과 계곡으로 이어지는 숲 터널로 들어선다. 몽환적인 숲 터널 주변을 감상하며 걷는 길은 흡사 별세계로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베릿내 골짜기 동쪽에는 대포주상절리가, 오른쪽에는 색달해변이 있어서 별세계의 신비함과 청량감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숲 터널 사이로 또 하나의 숨은 길이 이어지는 데, 이 길이 바로 베릿내 관개수로(灌漑水路) 유적이다. 숲 터널을 따라가는 물길은 큰 바위를 만나도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집채만 한 바위가 두 동강 나고 그 사이로 물길이 지난다. 이렇듯 이곳 선인들은 성천봉 아래로 물길을 내어 지금의 제주국제컨벤션센터가 들어선 일대의 농지 5만여 평에 천제연의 물을 대어 논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베릿내 관개수로 개척자 채구석

성천답관개유적비는 대정군수 채구석이 천제연 물을 이용한 관개수로를 만들고 성천봉(베릿내오름) 아래의 넓은 논을 일군 공적을 기리고자 2003년 2월에 세워졌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경관이 수려한 이곳에 지방 나들이 가는 관리들이 묵는 숙소인 중문원(院)이 있었다. 중문원이 그 기능을 다 할 즈음인 20세기 초, 농업 근대유산인 관개수로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천제연의 맑은 물을 이용하려고 해도 계곡 주변에 박힌 암반들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바다로 흘려보내야 했던 상황이라 마을 사람들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01년에 일어난 신축민란 때 대정군수에서 파직당한 채구석이 이곳 중문에 살면서 바위를 뚫고 수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3년에 걸친 그의 노력 덕분에 주민들은 논농사를 짓고 곤밥(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천제연 1단폭포 동쪽 절벽 위에 있는 채구석기적비, 대정 유림이 1957년 8월에 세웠다. 천제연의 제1단과 제3단 폭포 주변에 세워진 공덕비들은 과학적인 사고와 개척정신이 뛰어난 채구석 군수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채구석과 주민들이 1906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천제연 관개수로 공사를 완공하여 황무지를 옥답으로 바꿔 쌀 생산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다. 19세기 초 안덕면 월라봉 황개천 주변 5만여 평의 논밭을 개척한 한경면 저지리 출신인 김광종, 20세기 초 천제연 베릿내 관개수로를 개척한 한수풀 출신의 채구석, 일제강점기에 어승생 물을 광령리로 끌어내어 논밭을 만든 애월면 신엄리 출신인 백창유, 이 세 분을 제주에서는 ‘3대 수로 개척자’라 일컫는다.
 

 

▲숲길 도처에 숨어있는 관개수로 개척사

천제연 관개수로가 지나는 곳은 단단한 조면암 지대이다. 이곳에 물길을 내려면 바위를 뚫어야 한다. 장비라고는 곡괭이와 정과 징 등이 고작이었던 시절, 채구석은 물과 장작불과 독주 등으로 온도 차이를 이용하는 과학적인 공법을 터득하여 수로를 만들었다. 암반 위에 장작불을 뜨겁게 지펴 바위를 달군 다음 독한 소주를 부어 바위를 더 뜨겁게 하고는 그 위에 찬물을 부어 급속히 냉각시켰다.

그 결과 급격한 온도 차이를 이겨내지 못한 바위에 틈새가 벌어지면 석공들이 바위틈으로 길을 내었다. 이처럼 채구석은 바위가 균열되는 과학적인 방법을 응용하여 수로를 냈던 것이다. 베릿내 숲길은 천제연 주변 암반을 뚫고 물이 흐르도록 한 관개수로를 따라 ‘같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숲길에는 나무 향이 은근히 배어있으나 물길은 방치되듯 숨어 있다.

베릿내의 환상적인 숲길과 함께 이 길에 숨어 있는 관개수로를 따라 걷는다면, 이는 천제연의 비경과 비사도 보는 일석이조의 여행이 될 것이다. 당국에서는 암반 사이로 난 길을 또 하나의 명품 길로 가꾸어나가길 기대해 본다.

▲신축민란에 대해서 보다 - 채구석을 통해 본 당시의 시대상

신축년인 1901년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당시에 발생한 교폐(敎弊)와 세폐(稅弊) 등으로 상무사원(商務社員)과 천주교도와의 충돌을 시발로 일어났다.

상무사는 1901년 채구석·오대현·강우백 등이 대정군민들과 함께 일본인의 어장침투, 경래관의 노략질, 봉세관의 세폐와 일부 천주교도의 교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설립한 단체였다.

상무사의 지도자이며 당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은 사건이 마무리되는 동안 관민 사이를 오가며 유혈충돌과 난의 확산을 막고, 프랑스인 신부 보호 등에 진력하였다. 봉세관인 강봉헌의 무고로 채구석 군수는 한성으로 끌려갔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결국 군수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후 중문에 거주하던 채구석은 1899년 구좌면 종달리에서 실패한 간척 사업을 떠올리며 천제연의 용천수 주변 지세를 1905년부터 3년간 답사하고 물길을 열어, 성천봉 아래로 물을 대어 5만여 평의 논을 개간하였던 것이다.

채구석은 1894년 제주판관 재임 시 제주에 흉년이 들자 사재를 들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혹한 세금 때문에 일어난 화전민인 방성칠의 난(1898년)을 진압하지 못했다 하여 면직되기도 했다. 1899년 재차 대정군수로 부임한 후 이재수의 난(신축항쟁:1901년)이 일어나 민군과 천주교인 사이에서 거중조정 역할을 하지만 또 파직을 당하였다.

결국, 민란 주동자였던 삼의사인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은 교수형에, 도민의 원성을 샀던 봉세관 강봉헌은 사형이 구형되고, 채구석은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 채구석의 석방을 위해 제주도민들이 청원하고, 당시 제주목사인 홍종우도 프랑스인 라크루 신부에게 요청함으로써 배상금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1903년 석방되어, 중문에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채구석의 아들 채몽인은 국내 굴지의 기업인 애경유지를 창업하기도 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