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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장애 아들이 통닭 데우려다… 잿더미가 된 삼부자 보금자리

새해 첫날 오후 주린 배를 채우려 큰 아들은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붓고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다. 기름이 달궈지기 전까지 잠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려고 방 침대에 누운 사이 '타닥, 타닥'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부엌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을 끄려고 물을 뿌려봤지만, 달궈진 식용유가 바깥으로 튀면서 더 큰 재난을 가져왔다.

 

손 쓸 틈도 없이 50대 아버지는 두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안전핀이 뽑히지 못한 채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은 소화기가 화재 당시 긴박한 상황을 증언하고 있었다.

 

 

전모(55)씨 삼부자의 보금자리는 지난 1일 해가 진 오후 6시께 잿더미로 변했다. 전씨는 수원시 팔달구 고등동 주거밀집지역의 한 단독주택에서 85세 노모를 2층에 모시고, 13살, 12살 된 두 아들과 함께 1층에 살고 있었다. 이른 저녁 둘째 아들과 함께 깜빡 잠에 든 사이 지적장애가 있는 큰 아들이 부엌에서 식어버린 통닭을 데워 먹으려다 불이 크게 번졌다.

 

임인년 새해 액땜을 했다고 하기엔 처참한 비극이 삼부자를 덮쳤다.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던 큰 아들은 함께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연기를 다량 들이마셔 동탄한림대성심병원에서 고압산소 치료를 받고 겨우 기력을 회복했다. 둘째 아들은 집이 불에 타면서 창문이 깨지는 와장창 소리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친·동생 잠든 사이 가스레인지 켜
프라이팬 올려놓고 게임하다 '화재'

 

1989년 10월 지어진 가정집에 주택용 화재감지기나 스프링클러를 설치했을 리 만무했다. 1층 70.2㎡를 모두 태웠다. 수원남부소방서 소방관들이 20분 만에 불을 껐기에 망정이지 자칫 진화 작업이 늦어졌다면 2층까지 불이 번져 올라갈 판이었다.


불이 나고 나흘 뒤인 5일 삼부자의 집은 사방으로 유리창이 모두 깨지고 검게 그을린 연기 자국이 지붕까지 타고 올라갔다. 거실엔 성모마리아상과 십자가가 있었다. 삼부자와 할머니는 고등동성당에 다니는 가톨릭 신자다. 불이 훑고 지나간 성모상과 십자가는 모두 검게 타버렸다.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가스레인지 옆에 있던 통닭 종이상자는 검댕이 그을음만 묻고 타지 않았지만, 천장을 타고 현관으로 향한 화마는 아버지 전씨의 갈색 구두와 두 형제의 운동화를 모두 까맣게 태워버렸다. 부엌 수납장에 놓인 라면 9개와 조미김은 포장지가 열기에 타버려 먹을 수 없게 됐다.

큰 아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하루 만에 퇴원해 기력을 되찾았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2층에 살던 팔순 노모를 최근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화재로부터 대피하는 데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천만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앞이 막막하다고 하면서는 허탈하게 웃었다.
큰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부자는 수원시에서 마련해준 긴급주거지원 시설(숙박업소)에서 사흘을 지내고 어제 낮에 주거지 2층으로 돌아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전선이 모두 타버려 임시 가설을 해놓고 겨우 차가운 기운만 가시게 한 채 노모가 쓰던 안방에 두 형제가 사이 좋게 누워 있었다. 식탁에는 오늘 포장지를 뜯은 것처럼 보이는 모닝빵, 귤 5개가 껍데기와 함께 뒤섞여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전씨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두 아들과의 보금자리를 잃었다는 황망함에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홀라당 타버려 앞이 막막하다고 하면서는 허탈하게 웃었다. 큰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잠든 사이 저녁 끼니를 때우려고 통닭을 데운 큰 아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이 더 컸다. 형제의 어머니는 둘째 아들이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할 때쯤 이들 부자 곁을 떠났다.

 

20분만에 꺼졌으나 옷·신발 등 전소
생활 막막… 수원시 등 도움 잇따라

 

삼부자는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도 아니다. 일일 생산직 아르바이트로 겨우 허기를 면하면서 살면서도 2층짜리 주택이 본인과 누나 공동소유 재산이라서 지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느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화재보험을 들지 않아 당장 살림집을 복구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당장 일을 해야 카드 값을 갚고 공과금도 내는데, 갑갑하기만 하다

 

불이 난 부엌 식탁에는 밀린 공과금 고지서가 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온 건강보험료, 과 한국전력의 전기요금 징수 청구서에 적힌 7만원 돈이 아쉬운 마당에 불로 모든 것을 잃었다. 경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두고 간 긴급구호물품 꾸러미만 제 색깔을 내고 있었다.


전씨는 "2~3일 연기가 빠져 나가니까 이제 2층에선 불 냄새가 안 난다"며 "아이들 옷, 신발이 다 타버려 지금은 두 아들 다 흰 실내화 밖에 없다. 당장 일을 해야 카드 값을 갚고 공과금도 내는데, 갑갑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시는 사단법인 함께웃는세상과 함께 오는 8일 '삼부자 가정집' 복구 작업에 나선다. 집 안에 타버린 모든 집기를 들어내고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는 집수리 프로젝트다. 소식을 전해 들은 복지단체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잇따르고 있다.

 

이날 오후 수원시자원봉사센터는 통조림 햄과 참치, 쌀, 생수, 라면 등 식료품을 고등동 행정복지센터에 전달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