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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문화, 역사를 말하다·(1)] 수원 연극, 과거를 잇다

먹고 살기 바빴던 격변의 그 시절… 수원에는 '우리들만의 무대'가 있었다

 

 

수원농고 연극반 출신 뭉쳐
1961년에 '화홍극회' 창립
단원 20명 시작 '곰' 첫공연
경기도 극단 연극의 '효시'

'수원예술극장' 이태실 배우 하루 다섯차례 '스파르타식 공연'
"콧구멍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관객들 가득 차 있었다"

'극단 城 30년' 책자 "예식장 개조 허락… 이런 횡재 어딨으랴"
2016년에 개관한 '소극장 울림터' 꾸준한 활동… 명맥 이어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그 대화 안에서 문화는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여러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류와 함께해 온 문화사(史)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번 '문화, 역사를 말하다' 연중 기획은 경인지역의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문화적 사건과 장소, 인물 등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격변의 시기와 함께 급속한 성장을 이룬 경인지역의 문화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고,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해주고 있을까. → 편집자 주

# 수원의 연극, 시작은 '학생들로부터'

신파극에서 시작한 신극사에서 경기도(수원)는 서울의 신파극단이 자주 찾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해방 전까지 경기도 자체 극단 활동은 찾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도내 극단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로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경기연극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수원이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수원의 연극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극단이 '화홍극회'다. 경기도 극단의 효시, 경기지역 연극활동의 모체 등으로 불리는 이 극단의 시작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수원농고에 우연히 연극반이 생겼는데, 열정적인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여 연극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화홍극회 이성룡 초대회장은 "선생님이 명동에 있는 다방으로 데려가면서 앞으로 연극 하고 싶으면 길을 알려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며 "덩달아 학교에서 지원도 해줘 연극에 입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학생들끼리 화장과 분장, 음악까지 해결해야 했다. 법원에 가서 판사복 본을 뜨게 해달라고 사정해 그려 입기도 하고, 수원역에 녹음테이프를 갖고 가 기적 소리 한 번 울려 달라고 기관사를 붙잡고 부탁하기도 했다. 졸업하기 전에는 천막을 쳐놓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각색해 연극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기에 대한 꿈을 갖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사회에서 다시 만났다. 수원문화원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연극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1961년 약 20명의 단원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화홍극회'다. 창립한 그 해 4월 서울농대 강당에서 이들은 유치진 작품, 김재식 연출의 '곰'을 창립공연으로 올렸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시기를 지나 문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시절. '화홍극회'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1970년대를 지나 수원에서 연극이 융성하게 된 시작점이 됐다.

# '나는 연극 배우다'

1986년 극단 '수원예술극장'이 아트 소극장을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그때.

수원예술극장 이태실 배우는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 27살 늦깎이 배우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서울이 아닌 수원에서 연극을 해도 공연예술인으로서 자부심이 높을 때였다. 무대와 관객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 이 배우는 수원을 지키는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그는 극단 생활이 "한마디로 '스파르타' 저리가라였다"고 회상했다. 수원예술극장에서 어린이 공연과 성인 공연을 함께 올릴 때면 오전과 오후로 나눠 하루에 5회 공연했다. 공연과 공연 사이 30분씩 짬이 나면 어린이 분장을 지우지도 못한 채 팔달문에서 할인권을 돌렸다.

한 번 다녀간 사람은 주소를 받아 회원으로 등록했고,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우편으로 할인권을 보내니 관객이 늘어났다.

 

 

 

소위 '오빠 부대'도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인기 많은 배우를 보려고 같은 연극을 10번씩 보거나 선물 공세를 하기도 했다.

'신의 아그네스'나 '돌고돌고돌고'처럼 인기 많은 극에는 150명이 정원인 소극장에 200~300명씩 앉았다. 관객은 초록색 우유 박스를 계단처럼 쌓아 천장에 닿을 듯 서서 보기도 했고, 무대 가장자리까지 나와 몸을 비틀고 앉아 보기도 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산소가 부족해 숨이 찰 지경이었다.

이 배우는 "배우의 콧구멍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관객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며 "조명이 켜지는 순간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관객들의 기운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연극의 샘터 소극장

예나 지금이나 무대(극장)는 극단들이 존재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공간만 있으면 다 들어갔다"던 이성룡 회장의 말처럼 회관, 다방, 레스토랑 등 무대만 있다면 어디든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러다 소극장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6년 5월에는 경기도 내 최초의 소극장인 돌다방 '전용소극장'에서 연극협회 수원지부 추진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81년에는 화홍예식장에 극단 성(城)이 소극장을 개관했다. 이후 피엠투 소극장, 수원예술극장의 아트소극장 등이 차례로 만들어졌다.

 

 

'극단 城 30년'이라는 책에는 소극장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화홍예식장 사장님께서는 예식장 청실을 소극장으로 개조하라고 허락을 하시니 이런 횡재가 어딨으랴, 웃통을 벗어 던지고 한여름을 보내고 개관하였다. 전부 미쳐 있었다. 날라 다녔다. 소극장이라니!'.

2011년에는 극단들에 희망과도 같았던 '수원시민소극장'이 문을 열면서 다양한 소규모 공연과 페스티벌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수원연극을 지켜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수원극단연합회도 이 소극장이 매개체가 됐다.

하지만 수원의 이 모든 소극장은 자금난과 주변 환경 등으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원의 연극 명맥을 잇고 있는 극단 중 하나인 '수원시민극단' 고영익 대표는 "연극에서 극장은 절대적으로 소중하다"며 "공연장이 없다 보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토로했다.

 

 

현재 수원의 유일한 소극장은 지난 2016년에 개관한 '소극장 울림터'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극단 '메카네'는 개관 이후 1년에 4작품 이상을 꾸준히 무대에 올렸고, 이를 대관하는 단체도 1년에 10~15개 정도이다. 메카네 김창환 대표는 "운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작은 규모의 극단들에게 절실한 소극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수원 연극의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

1970~1980년대 '먹고 살기 바쁘지 않았을까'란 의문 속에서도 연극은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까지 이어진 인기는 "서울에 가지 않아도 수원에서 좋은 공연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대단했다.

고 대표는 "그 시절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공연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며 "이제는 추억이 됐지만, 이 또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과거 활발했던 공연예술이 21세기 수원에서도 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들의 몫이다. 고 대표는 "의식과 환경이 다변화된 현대 사회에서 공연예술의 부흥을 이끌 방법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연극이라는 것에 매료된 이들은 여전히 남아 그 뒤를 잇고 있다. 또 수원이 가지고 있는 지역의 콘텐츠 또한 여전히 매력적이다.

화홍극회 이성룡 초대회장은 수원의 연극계를 보며 "셰익스피어가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라고 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거울이 되어 배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