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미술관에서 만나는 가벽을 모두 없앤 전시실에 들어서자 ‘색채 속을 유영하는 도시의 산책자’가 된 기분이 든다. 온화한 느낌의 불빛을 담고 있는 수십개의 전등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공간을 지나면 건물의 쇼윈도우처럼도 느껴지는 구조물이 보인다.
마치 색상표를 보는 것같은 다채로운 색감의 바(bar)가 수직으로, 또는 수평으로 조합된 작품이 걸린 공간으로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다 문득 구조물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밖’의 풍경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깥의 사람과 내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벽에 네온사인으로 설치된 ‘어떤 수식’ 들은 도심의 일렁이는 야경처럼도 보인다. 나즈막이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산책의 동반자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전승보)에서 열리고 있는 영국 출신 세계적인 설치미술작가이자 관계미학의 선구자 리암 길릭 전시회(6월27일까지)는 색다른 공간 체험을 전해주는 프로젝트다. “여러분이 마주하게 될 빛, 여러 추상적 형태들로 채워진 전시 공간이 흥미로운 경험이 되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각자의 시선으로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전시다.
광주 전시 준비차 2019년 10월 미술관을 방문했던 리암 길릭은 “작품을 통한 공간 변화에 관심이 있다”며 관람객들이 ‘동선’을 통해 어떻게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보였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뿐 아니라, 로비, 외관 창문, 북라운지까지 폭넓게 전시 공간을 활용, 관람객의 체험 범위를 확대했다.
데미언 허스트 등과 함께 영국 현대미술 대표 그룹 ‘YBM’ 멤버로 활동해온 리암 길릭은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로 선정돼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타국 국가관을 대표하는 외국인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또 뉴욕 모마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파리 팔레 드 도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아시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리암 길릭의 대규모 개인전으로, 지난 30년 간 그가 발전시켜온 주요 주제들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자리다.
‘워크 라이프 이펙트’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전시는 ‘일과 삶 간의 복잡 미묘한 긴장과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지털과 팬데믹 시대에 우리 일과 삶이 결합하는 양상들, 그리고 그 영향들을 감지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제시한다.
1~2갤러리에 전시된 다섯 작품은 독립적이기 보다는 영향을 주며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가장 흔한 회색으로 칠해진 벽면이 다채로운 색감의 네온사인과 간섭하고 어우러지며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신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수학공식이 적힌 이 네온사인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UCL)에서 발표한 ‘행복을 계산하는 공식’인데, 굳이 내용은 모르더라도 무언가를 넣고 빼는 자신만의 행복방정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환하게 빛나는 쇼윈도우같은 하나의 큐브 ‘워크 라이프 이펙트 스트럭처 A’에는 추상적 형태의 ‘Fins’와 ‘Horizons’ 시리즈 신작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색채의 매력에 빠져볼 수 있는 공간으로 치유받는 느낌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실에 흐르던 ‘피아노 음악’의 정체를 만난다. 두 번째 큐브 ‘워크 라이프 이펙트 스트럭처 B’에는 디지털 피아노와 스노우머신으로 구성된 작품 ‘눈 속의 공장 -우편 배달부의 시간(2007)’이 놓여있다. 건반과 패달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연주하는 음악은 군사정부에 대항하는 1974년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민중가요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andola Vila Morena)’다. 전시실 의자에 앉아 흩날리는 ‘검은 눈’을 보며 반복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누군가가 위로를 건네는듯하다.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1층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새로운 공간과의 만남이다. 사진 촬영 스폿으로도 그만이니 놓치지 마시길.
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관람객이 앉아 쉴 수 있는 ‘Moderation Toolbox-Gwangju Stool’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S자형태’의 나선형 벤치로 베니스비엔날레, 구겐하임뮤지엄 등에서 선보인 버전의 확장판이다. 미술관 입구의 커다란 유리벽에 맵핑된 텍스트는 우리 삶에서 사용하는 업무용어들이 패러디돼 시(詩)처럼 적혀 있으며 미술관의 내부과 외부, 관람객과 공원이용객이 마주하는 북라운지 공간에서는 신작 ‘마음의 키오스크 광주’를 만날 수 있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