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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新 호남 의병 이야기 <30>]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담양·나주·함평·장성서 맹활약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10>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맹장 김준(태원)
나주에서 김노학의 장남으로 태어나…총명·용맹하기로 유명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한반도 정세 급변…나라 국권 회복 다짐
체포된 기삼연을 구출하려다 일본군 집중사격에 함평서 전사
1962년 건국공로훈장 추서…국립묘지 애국선열묘역에 안장

 

일본군이 한말 의병과 만나면 어느 군사인지부터 먼저 물어 “김준(태원)의 군사다”라고 말하면 슬그머니 도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김준의 부대는 지역주민만이 아니라 일본군 사이에서도 잘 싸우기로 유명했다. 담양, 나주, 함평, 장성 등에서 맹활약했으며, 전라도 내에서는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1870년(고종 7년) 10월 15일 나주시 문평면 갈마지(현 북동리)에서 김노학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태원, 호는 죽봉이었으며,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집이 가난해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주경야독하며 총명함이 주변에 알려져 죽림 최고 부자 김억희가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김준은 대보름 줄다리기에 참여해 승리로 이끄는 등 힘도 셌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2년 동학혁명 등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이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김준은 갈마지 뒷산 국사봉에 올라 나라의 자주와 국권 회복을 다짐했다. 김준은 동학혁명을 현장에서 보기 위해 전북 고부에 가 동학군에 합류했다가 나주로 돌아왔는데, 이후 동학당으로 분류돼 관군이 체포하려하자 동생인 율과 경성으로 도피했다. 가는 도중 수원에서 김하락을 만나 눌러앉은 김준 형제는 1895년 8월 을미사변 이후 거병한 경기도 의병에 참가했다. 김하락은 조성학, 구연영, 신용희 등과 한국군 화포군도영장 방춘식 등과 뜻을 합쳐 100명의 포병을 모았고, 김준은 의병 규합을 위해 안성에 갔다가 그곳에서 의병장 민승천을 만나 그의 참모가 됐다. 경기도 각지의 의병이 이천에 모여 연합전선을 펴기로 했는데, 이 때 총대장은 민승천, 선봉장은 김준이 맡았다. 이들은 1896년 1월 17일 과천 방면으로 오는 일본군 수비대에게 복병계를 쓰기로 하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후 다음날인 18일 대낮부터 전투를 시작했다. 계속 매복한 의병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일본군을 포위했는데, 일본군은 수십명의 시체를 남긴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준은 이를 추격해 무기, 군량, 탄환 등을 노획했다. 김준의 용맹무쌍함은 경기도 전역에 알려졌는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인해 존왕양이를 내건 의병들의 명분이 사라지면서 김준은 동생 율과 함께 낙향했다. 이후 지방관 폐단과 횡포를 관찰사에 호소해 바로잡아 나주, 함평 등에서 주민들의 칭송이 높았고, 참봉이라 불리며, 크고 작은 송사까지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국사봉에 올라 토적을 다짐한 김준은 동생 율, 먼 친척 김돈과 거병을 협의했다. 무기, 군량, 군사 등의 문제를 논의한 뒤 장성 기삼연 부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조경환, 강길환, 이덕관, 유병기, 양상기, 오영찬, 김찬문, 김해도 등도 찾아왔다. 일제가 내정에 깊숙히 개입하면서 의병들은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탄압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다 훈련도 안 돼 오합지졸인 상황이었다. 500여 명을 규합한 기삼연은 김준을 선봉장으로 임명했다. 호남창의회맹소에는 진안, 임실, 순창, 장성, 고창, 남평, 나주, 함평 등 호남의 거의 모든 우국선비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기삼연은 의병들을 이끌고 고창 문수사에 들어가 진을 구축했다.

 

 

 

일본군이 문수사로 쳐들어오자 의병들은 당황하며 대처하지 못했으나 김준이 이끈 일행들이 앞장서 정확한 사격으로 일본군을 저격하면서 격전 양상이 벌어졌다. 1시간여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후퇴했으며, 김준 등 5명이 특공대를 구성해 뒤쫓아가 타격을 입혔다. 날이 밝자 기삼연은 장성 통안촌으로, 다음날 새벽 다시 장성 삼계면으로 이동했다. 이 때 김준은 5일 후인 9월 23일 장성군 삼계면 수각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통령 김용구, 김찬문 등과 자신의 고향인 나주 갈마지에 다녀왔다. 이 때 의병 300여 명이 모여 누군가가 지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이천만 예의민족이 어이 왜적에게 굴하여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어이 왜적에게 주랴. 아 아 우리 동포형제들이여 불공대천의 수적(讐敵)을 멸하고 우리 성상 모시세. 만만세.” 김준과 기삼연은 고창으로 향해 고창분파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30여 명을 기습, 20여 명을 사살하고 병기고를 접수했다.

기삼연의 김준에 대한 믿음은 대단히 컸다. 일본군에게 노획한 최신 장총을 김준 부하들에게 지급하고, 모든 전략도 김준과 논의했다. 오랜만의 승리로 분위기가 들뜨면서 의병들은 술을 마시며 푹 쉬었다. 그러나 김준만은 일본군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새벽 일본군의 포 공격이 시작됐다. 술과 잠에서 깨지 못한 의병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10여 명의 특공대를 꾸린 김준이 선봉에 서서 일본군 포대를 집중 공격하면서 일본군 5~6명을 쓰러뜨렸다. 일본군 포대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기능이 마비되자 총격전에 나선 일본군과 시가전 양상이 벌어졌다. 날이 밝아오도록 전투는 계속됐는데, 쌍방의 피해도 커졌다. 5시간의 대혈투 속에 2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일본군이 퇴각했는데, 의병도 피해를 점검해보니 종군장인 김익중이 전사하는 등 겨우 20여 명만이 남을 정도였다. 통령 김용구가 적은 ‘의소일기(義所日記)’에서는 “왜적과 내통한 밀고자가 있어 불의의 기습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는데, 일본군이 퇴각하고 우리 군사도 점검하니 뒤에 따라오는 자가 18명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이후 장성에서의 대승, 법성포 기습, 장성 오동촌 격전 등을 거친 뒤 백양사 전투를 마지막으로 기삼연 부대는 소규모로 나눠 유격전을 펼치게 됐다. 일본군의 잦은 공격과 견제 속에 대규모 진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준은 우선 함평으로 와 50여 명을 규합해 훈련한 뒤 고창 문수사에 진을 쳤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던 김준은 몰려오는 일본군에 대비해 1진은 매복하고 2진은 자신을 따르게 했다. 김준은 농사꾼으로 가장해 밭에 나가 풀을 베기 시작했는데, 30여 명의 완전무장 일본군이 이동하면서 김준에게 의병의 위치를 물었다. 김준은 “조금 전에 20여 명 의병들이 문수사로 들어갔다”고 답했고, 안심한 일본군이 발길을 재촉해 계곡 속으로 들어가자 1진에게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김준도 뒤에서 맹공해 포위 당한 일본군은 전멸했다.

30여 정의 총과 탄환을 확보한 김준은 일본군의 역습에 대비해 고정된 진지 없이 막사에서 자며 나주, 함평 등을 옮겨다녔다. 1907년 12월 함평 나산장터에서 순찰 나온 일본군을 사살하고, 광산군 삼도면의 면장이자 친일파인 유선근의 집을 기습해 유씨를 처형하는 등 고창, 법성포, 나주, 함평 등에서 출몰했다.

1908년 1월 일본군의 대반격을 예상한 김준은 무등산 무동촌(담양군 남면 무동리)로 들어갔는데, 바로 옆 마을인 화순군 이서면 인계리에는 동생 율이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 주민 중 밀고한 자가 있어 의병잡는 귀신으로 알려진 요시다 소좌가 일본군을 이끌고 마을 내로 들어오자 김준은 돌담을 이용하기 위해 의병들을 분산 배치한 뒤 사격 솜씨가 뛰어난 의병들에게 요시다 소좌를 집중사격하도록 했다. 요시다 소좌가 말에서 떨어지자 나머지 일본군들은 도주했으며, 김준은 직접 요시다를 참수했다. 요시다의 옷과 짐을 뒤져 12개국에서 승전한 훈장, 보검, 망원경 등을 노획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준은 급히 제1대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등산을 넘어 40리길을 달려 광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기삼연이 수감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본진으로 돌아온 김준은 함평 등지에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나 1908년 4월 25일 김준은 광산 어등산에서 요통으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일본군은 보병, 기마병, 경찰 등을 총동원했는데, 이 때 움직일 수 없었던 김준은 부하들에게 피할 것을 명령하고 단정히 앉아 총을 계속 쐈다. 이어 일본군 집중사격에 전사했는데, 그 때 나이가 38세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시신은 국립묘지 애국선열묘역에 안장됐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