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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新 호남 의병 이야기 <30> 뛰어난 지략으로 왜적을 섬멸한 몽암 신덕균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9>
가산 모두 기울여 무기 구입…지리산 일대서 대활약
광주군 서방면 우산리 출생…두뇌가 총명하고 의협심 강해
28세에 태인서 거병, 이듬해 고광순 의병중책 참모로 참여
1908년 내장산 전투서 적군 총탄에 의해 29세 나이로 순국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신덕균은 폭우로 인해 수해가 극심했던 1878년(고종 15년) 9월 21일 광주의 서방면 우산리(현재 우산동)에서 20세의 수은 신태수, 19세의 옥천 장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장씨가 태몽으로 꿈에 용을 봤다고 전해지며, 덕균은 배꼽 밑에 점 3개가 있었다. 어릴 적 이름은 덕순을 썼고, 자는 정효, 호는 몽암이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머리가 총명했는데, 12세부터 서당에 다녔다. 무등산 아래 등촌(현 충효동 부근)의 진사 장석헌에게 글을 배우고, 장성의 송사 기우만, 담양의 양재 전우에게 강론을 받았다. 이후 서방면 우산리에서 각화리(현 문화동)로 이사한 덕균은 낙고정사(樂古精舍)를 짓고 친구들과 머물며 교유했다. 의협심이 남달랐던 덕균은 담양수령 가마꾼들이 인근 주민들이 절을 제대로 안 한다고 괴롭히자 몽둥이를 들고 가 가마꾼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 일로 전주감영까지 호출됐으나 당당하게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훈계방면됐다.

 

 

28세 때인 1906년 1월 30일 태인에서 거병한 면암 최익현의 격문을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거병 의지를 밝히자 아버지 역시 효보다는 충을 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덕균은 낙고정사에 모인 친구들과 동지 규합에 나서 4월 20일 순창에 있는 최익현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담양에서 최익현이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한 덕균은 홀로 순창으로 가 최익현을 면회했다. 최익현은 덕균에게 귀가해 충의에 힘써 후일을 도모할 것을 당부했으며, 그 길로 집에 돌아온 그는 병법, 전략 등을 공부하며 거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집안일은 동생인 의균에게 맡기고, 6촌 동생인 석균과 거병을 논의하던 그는 1906년 3월 3일 능주와 보성에서 일어난 의병 수백 명이 화순읍 일본인 주택과 상점 10여 호에 불을 지른 뒤 동복으로 나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의병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5개월간 전전긍긍하던 덕균은 담양 창평에서 고광순이 거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8월 3일 알고 지내는 고광봉을 찾아가 소개를 부탁, 담양 운산리에서 고광순을 만났다. 고광순은 그를 참모로 기용한 뒤 그날 밤 제사를 지내고 5일 오후 담양을 향해 출정했다. 8월 6일 곡성 석곡을 거쳐 화순에 도착했는데, 덕균은 동복 읍내의 일본군을 기습할 것을 건의했다. 이를 고광순도 찬성해 밤길 70리를 걸어 7일 새벽 도포사 박화중이 선두에 서서 동복분파소를 공격했다. 일본군들은 도주했으나 선봉에 섰던 박화중은 전사했다. 고광순과 덕균은 10일 지리산으로 향했다. 일본 경찰이 쓴 전남폭도사에는 “9월 15일(양력) 새벽 6시 폭도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광주로 철수했다. 미야가와 보조관이 보조원 6명, 순검 1명을 끌고 특무조장 1명, 병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1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였다.”고 돼 있다.

고광순과 덕균은 하동을 거쳐 구례 연곡사에 들어가 1개월간 훈련한 뒤 음력 9월 10일 덕균은 일부 의병들을 데리고 화개마을로 들어온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일본군이 연곡사를 기습했다. 연곡사에 남아있는 고광순, 고제량 등이 9월 11일 전사하면서 신덕균이 이끌던 의병들은 흩어져버렸다. 덕균은 윤영기와 함께 광주로 향하다 곡성군 석곡면 봉림리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받자 광양군 비촌으로 피신, 그곳에 살던 황도유에게 며칠간 의탁했다. 이후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 산속에서 호서지방 의병장 윤내린, 전승화 등을 만난 덕균은 산포수들로 구성된 의병들과 합세해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의 산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4개월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06년 12월 28일 충청도 의병장 박서익이 군인 출신 6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에 합류했으며, 29세가 된 덕균은 화개로 가다가 그 중간에서 일본군 30여 명과 마주쳐 교전 끝에 후퇴했다. 또 1907년 1월 29일 남원 실상사에서 패해 달아나고, 2월 10일에도 운봉 엄천에서 격전을 벌였지만 불리해지자 돌아섰다. 선균은 이 같은 실패의 원인이 무기 탓이라고 생각, 박서익에게 병력을 맡기고 무기 마련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가산을 모두 기울여 무기를 장만한 덕균은 순창 회문산에 이를 보관하고 국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윤영기를 서울로 보낸 다음 최익현의 수하 장수들을 흡수해 1907년 10월 1일 광주를 떠났다. 3일 장성 백양사에서 제사를 지낸 뒤 4일 정읍 내장사로 들어간 석균은 김준과 만나 그 부대에 합류했다. 의병진을 정비한 김준이 선봉장을 맡고, 참모장에 신보현(순창), 좌우익에 채영찬·채상순(순창), 후군에 양춘영(순창)·조공삼(순천), 중군에 임화지(순창)·황창균(무주)·유장열(고창)·양치언(남원)·임당(태인)·김봉권(태인) 등을 배정했다. 덕균은 중군장을 맡았으며, 김준의 아우 김율은 호군을 맡았다. 이들은 “광주를 무찌르고 목포를 깨뜨리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돌리며, 순창 회문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10월 15일 밤 일본군의 야습 감행 소식이 전해지자 14일 밤 작전 회의를 한 김준과 덕균 등은 무기가 천보총 3정과 10여 정의 화승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 달이 밝으니 투석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의병 300여 명은 15일 밤 9시께 보름달 속 진군하는 일본군을 향해 바위와 나무를 굴려 떨어뜨렸다.

투석전 3시간 만에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두고 간 무기, 문서, 현금 등을 노획한 의병들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17일 오후 2시 다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덕균이 정찰에 나서니 무수한 일본군이 10여리 밖에 집결하고 있었다. 덕균은 긴급참모회의를 열었는데 퇴각, 투석전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격론 끝에 내장산으로 물러서면서 회문산 일대에 불을 내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는데, 이 때 능선을 타고 고지로 쳐들어온 일본군이 의병 막사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격전중에 잠시 연기와 화염으로 일본군이 총을 못쏘는 틈을 타 의병들은 내장산으로 퇴각했는데, 19일 오전 내장산 전체를 포위한 일본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초겨울 내장산에는 눈발이 날리고 연일 강행군으로 의병들은 지친 상태였다.

일본군이 병력을 증강해 정면으로 공격하자 덕균은 해산을 명령하고, 본인은 빗발치는 총탄에도 남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김봉권, 임당 등도 생사를 같이 하겠다며 남았다가 덕균과 함께 체포됐다. 그는 고문으로 아픈 몸임에도 단정히 앉아 맹자의 구절을 외우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정읍 감옥에서 사흘만에 고부로 이동한 석균은 경무대장의 심문에 “내 목이 잘리더라도 순종하지 못하겠다. 이토 히로부미와 5적 놈들 살가죽을 벗겨 깔고 자고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며 삼천리강토를 회복하겠다.”고 외쳤다.

1907년 11월 7일 감옥에서 끌어나온 석균은 두승산에서 총살을 당했는데, 동지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죽음을 고수하여 도에 따르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룩하는 것은 옛 성현의 법칙임을 나는 알고 있다.”며 태연히 말했다. 총살 직전 할 말을 묻자 “송나라 문천상이 나는 오늘로써 내 일을 끝마쳤다고 했는데, 나도 그와 같은 심정이다.”며 서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세 번 만세를 부른 뒤 2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그의 동생 의균이 나중에 가매장된 곳에서 배꼽 아래 3개의 점으로 석균의 시신을 찾아내 광주에 이장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