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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개성공단 폐쇄 5년 멈춰버린 평화시계]우리가 잘 몰랐던 개성공단의 일상

"아랫동네 빤스도 많이 물어봐" 긍정적으로 입소문 퍼진 남한

 

月 80불 상당 급여·생필품 '北 최고 직장'
남북 한공간서 일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도

소통공간 편의점 '잊을수 없는 전화번호'
회담 결렬 전날 '부엌서 라면' 에피소드
인터넷 안돼도 여가 즐길수있는 공간 있어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리의 아침은 여느 남쪽의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남측의 북적이는 출근길 풍경처럼 이곳 역시 개성 시내로부터 출발한 출근버스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우르르 내려 일터로 바삐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남북 노동자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 일했다.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자식들은 무슨 대학에 갔는지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다만 식사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약속된 사안이었다. 남측 사람들은 구내식당이나 음식점을 이용했고, 북측 사람들은 도시락을 준비해 왔다. 남측에선 국을 제공했다. 춘궁기에 밥을 싸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면 국 대신 잔치국수로 대체하는 배려도 있었다.

북한 노동자의 월 최저임금은 73.87달러였다. 연장근로수당과 야간·휴일수당을 포함하면 많게는 150달러 이상 받기도 했다. 150달러는 당시 환율로 한화 17만3천원 정도다.

농사나 장사가 주된 돈벌이 수단이었던 북한 사회에서 직장에 출근해 임금을 받는 개성공단은 그야말로 '최고의 직장'이었다. 공단 노동자들은 매달 80달러에 달하는 북한 돈을 임금으로 받았고 이 밖에 설탕과 밀가루, 식용유 등의 생필품도 받았다.

탈북민 최모(55)씨는 "80달러면 북한에서 쌀 160㎏을 살 수 있는 돈"이라며 "식구 중에 1명만 개성공단에서 일해도 먹고 살 걱정은 안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북한 사람들에겐 소위 '인생역전'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개성공단이었다.

조그마한 농촌 마을인 개성에 남한의 공장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북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탈북민 박모(51)씨는 특히 개성공단표 속옷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서 속옷 장사를 했던 박씨는 "아랫동네(남한) 빤스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얇은 천으로 만들어져 찢어지진 않을지 걱정했는데 편안하고 통풍이 잘돼 부르는 값에 팔렸다"며 웃었다.

공단에 근무하는 남한 사람들 얘기도 물건 못지 않게 널리 전파됐다. 북한에선 늘 비난의 대상이었던 '남조선'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개성공단은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공단 내 유일한 편의점 CU의 점장을 지낸 한지훈(40) BGF리테일 경기북영업1팀장은 "아직도 '001-8585-2299'라는 개성 1호점 전화번호가 기억난다. 가끔 전화를 걸어보면 통화 중이라고 돼 있었는데, 이젠 아예 신호가 가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편의점에선 모든 거래가 달러로만 이뤄져 달러가 없던 북한 노동자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점장과 부점장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직원은 모두 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단 내에서 남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실제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편의점을 찾는 남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공단 종합지원센터 내 급식소에서 영양사로 일했던 김민주(35)씨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개성공단으로 출근합니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2015년 12월11일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씨는 "당시 남북이 공단에서 당국회담을 진행했는데 갑자기 인원이 늘어 밥이 부족해졌다. 밥을 새로 하려 하자 북한 직원들이 라면을 먹자 했고 그때 처음으로 그들과 부엌에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며 "라면과 김치, 찬밥이 전부였지만 참 따뜻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튿날 회담 결렬 소식이 전해지자, 전날 함께 식사를 나눈 이들과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이가 됐다. 그는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결국 우리를 갈라놓게 되더라"라고 털어놨다.

휴대전화는 물론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했지만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은 곳곳에 있었다. 스포츠를 즐기는 건 북한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계절과 관계없이 삼삼오오 네트에 모여 배구를 즐겼다. 유독 배구를 즐기는 이유는 '장군님이 지정해 준 국방체육'이었기 때문이다. 야근이 없으면 북한 노동자들은 저녁 무렵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퇴근했다.

공단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듯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며 함께 살았던 곳. 때론 묘한 긴장감도 감돌지만 다름을 인정한 채 공존하고 융합하며 어우러져 살아갔던 곳. 이곳 역시 결국은 사람 사는 동네였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글 : 황성규차장, 공승배, 남국성기자

사진 : 조재현기자

편집 : 김동철, 박준영차장, 장주석기자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