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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율곡에게 길을 묻다]정확한 자리 찾는다며 옮겨 다니던 율곡 선생 집터 표지석…화단 구석에 덩그러니

외할머니가 물려준 서울집 수진방

 

강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율곡은 6세 되던 1541년(중종 36년)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의 집이 바로 율곡의 외할머니가 후에 선생에게 물려준 수진방이다.

이 수진방에서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우고 이치를 깨달았다. 이후 서울과 파주를 오가며 생활하던 중 1550년 아버지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에 임명된다. 서울에 올라온 지 9년 만에 직업다운 직업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수진방으로 떠나 삼천동의 한 우사로 가족이 이사를 간다. 우사는 관리들이 임시로 빌려사는 집이다.

세곡을 실어나르는 임무를 받은 아버지를 따라 율곡은 큰형과 함께 평안도로 떠난다.

그것이 어머니를 본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평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 음력 5월17일. 사임당은 병으로 누운 지 2, 3일 만에 홀연히 별세했다. 수진방을 떠난 뒤 어머니마저 잃고 그 마지막마저 지키지 못한 율곡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평생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16세의 청년 율곡은 3년간 묘소를 지키는 여묘살이를 했다. 제수를 장만하고 제기를 닦는 일도 직접 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도 그 한이 풀리지 않아 19세가 되던 해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 어머니의 죽음은 율곡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충격이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수진방의 집터 표지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네이버에 들어가 찾아봤다. 첫 정보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7-28. 백상빌딩 앞 화단에 있다는 것이었다. 내이게이션을 찍어 백상빌딩과 SK건설 빌딩은 찾았지만 몇 바퀴를 돌아도 율곡 선생이 살던 집터 표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옆 SK건설 빌딩 옆으로 400년 된 회화나무가 보였다. 회화나무를 안내하는 표지에 이 터는 조선시대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았던 집터라고 소개됐지만 인터넷으로 봤던 표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백상빌딩 앞 관리인들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인가 서울시에서 걷어 갔다는 것이다. 율곡 선생 집터를 안내하는 표지석을 찾기 위해 서울시청 역사문화재과에 문의했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 알 수 없다며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4시간 뒤 담당자가 연락이 왔고 바로 찾을 수 없어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2시간 뒤 2015년 율곡 선생의 집터로 추정되는 현재 승동교회 자리로 옮겨졌다는 안내를 받았다.

표지석이 옮겨지게 된 것은 2013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가 서울에 있는 335개 문화재 표석을 전수조사한 결과 57.6%인 193개가 정비대상으로 나타났고 이 가운데 율곡 집터 표지석은 엉뚱한 곳에 설치됐거나 심각한 오류가 있는 A등급 정비대상으로 분류됐던 것. 함께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한경지략(漢京識略),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등에 율곡이 살던 대사동 집은 바로 정승 신만(申晩)의 집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정승 신만의 집은 대사동, 즉 탑사동에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옛 지도와 현재 항공 지도까지 비교 대조해 대사동과 가장 근접한 승동교회 자리로 옮겼다는 설명이다.

옛 기록에 따라 정확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런데 인터넷 등에 나온 율곡 선생 집터 표지석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서글퍼진다.

1987년 처음 세워질 때는 백상빌딩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했다. 그러다 몇 년 후 백상빌딩 측면으로 옮겨졌고 2015년 승동교회 자리로 옮겨질 때도 한가운데 3·1운동 유적지 표지석과 나란히 배열했다. 그리고 또 몇년 뒤 그 건물 옆 화단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렇게 당당하고 자랑스럽던 율곡 선생의 유적지를 알려주는 수진방 집터 표지석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는 모양새가 마치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조상원기자 jsw0724@kwnews.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