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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천년의 역사 탐라국이 사라지다

(142)탐라왕자묘(上)
고려 말~조선 초기 축조된 왕자묘, 당시 높은 위세 가늠케 해
탐라왕자·성주, 조선의 본격적인 탐라 지배에 점차 세력 약화


▲다시 찾아간 ‘하원동 탐라왕자묘’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54호인 하원동 탐라왕자묘를 다시 찾았다. 하원동(21번지)의 볕 바른 능선에 남북으로 위치한 고분 3기의 주인은 아직 누군지 모른다. 다만 제주도 유산본부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남평문씨 남제공파 종문회에서 성묘하고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복성현 출신인 문착(호:南濟)이 입도하여 성주 고씨의 사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제주에서는 입도조 문착의 후예들을 남평문씨 남제공파라 일컫는다.

제주도는 1998년 남평문씨 남제공파 종문회의 청원에 따라 제주대학교 박물관팀으로 하여금 1999년부터 2차 정밀발굴조사를 시행케 하였다.

발굴결과 출토된 자기·지석좌대·갓석·향로대·문인석 등의 21점은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기 묘역 중 가장 먼저 들어선 3호분에서는 관정과 청동그릇 등이 수습되었다.

1914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 출토된 14세기경 제작된 백자병과 청동합 등 8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석재로 구성된 묘역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인 13세기와 15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평가된다. 해발 220여 미터의 높은 능선에 일직선으로 조성된 분묘의 축대는 당시의 묘 주인의 위세를 가늠케 한다. 가파른 지형에 조성된 1호분은 상당한 인력이 동원되어 만든 묘역으로, 곽의 구조와 각종 석물과 석상, 계단시설, 축대 등이 3기의 분묘 중 가장 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호분과 2호분의 테두리 돌담이 서로 중복되어있는 것은 1호와 2호의 무덤 주인은 서로 강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말선초의 탐라변천사

하원동 왕자묘가 조성된 역사적 배경과 인물 등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탐라지(1653년)와 탐라지초본(1842년) 등, 여러 역사서에서 발췌한 제주의 주요 역사문화를 다음과 같이 연대별로 소개한다.

1270년 삼별초 김통정 장군이 입도하여 토성을 구축하니, 도내 민심은 풍운에 휩싸였다. 탐라성주 고인단과 탐라왕자 문창우가 이를 고려조정에 알리니,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벌하러 나서고, 이후 원은 탐라에 초토사(招討司)를 설치하여 탐라를 지배하려 하였다. 1373년 원의 목호가 고려에서 파견된 관리를 살해하니, 왕자 문신보가 아우 문신필을 조정에 보내 이를 아뢰었다.

원나라에 이어 중국대륙에 들어선 명나라는 ‘원이 통치했던 탐라는 명의 땅’이라며 탐라마(馬) 2000필을 재차 요구하자, 공민왕은 목호를 정벌하기 위한 출정군을 편성하여야 했다. 최영 장군 부대가 원나라 목호를 몰아낸 다음 해인 1375년 제주에서는 차현유 등이 관청을 불사르고, 안무사·목사·마축사 등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키자, 성주 고실게(고신걸)·왕자 문신보 등이 군졸을 모아 반란을 막았다.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는 한양천도의 해인 1396년에 이숙번을 탐라로 보내어 평정케 한 후 처음으로 여의손을 만호겸 목사로, 1400년에는 판관을 두어 교수를 겸하게 하였다. 1401년에는 안무사를 두어 목사를 겸하게 하는 등 본격적인 탐라 지배가 시작되었다. 1402년 조선의 강력한 통치정책으로 시운이 불리함을 통감한 탐라성주 고봉례와 탐라왕자 문충세 등은 성주와 왕자 칭호가 참월(僭越)하고 월권(越權)한 듯하여 이를 고치기를 조정에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에 대한 예우가 계속되어 오다가, 1445년(세종27) 소관호수(小官戶數)가 많다는 이유로 마침내 성주와 왕자 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주사 연표’의 주요 역사문화와 ‘탐라성주’ 소개

격동의 시기를 대표하는 제주의 주요 역사문화를 ‘제주사 연표(濟州史 年表, 제주도, 2005년)’를 통해 엿보고자 한다.

“(938년)탐라국왕 고자견이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성주와 왕자의 작위를 하사 받다. (1105년)탁라가 탐라군으로 바뀌며 고려에 영속되다. 이로써 독립국이던 탐라는 고려의 영토에 속하는 변방인 속방이 되다. (1149년)고려조정에서 제주 출신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한 이로 알려진 고조기가 중서시랑 평장사로 임명되다. (1266년)성주 고적(高適)이 고려왕을 알현하고 몽고에 가다. (1268년)원나라가 탐라에 전선 100척을 건조하게 하다. (1270년) 삼별초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조정에서 김수 영암부사와 고여림 성주를 제주도에 파견하나, 삼별초가 제주를 함락시키다. (1272년)삼별초가 탐진현과 합포(마산) 등을 불사르고 약탈하자,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가 개경에 사신을 파견하니, 고려조정과 원나라에서 탐라정벌에 나서다.….”

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고조기와 고조기의 손자인 고적 그리고 고적의 장자 고여림 등에 대하여 고씨 종문회에서 펴낸 ‘탐라성주(耽羅星主:2018)’를 통해 엿보고자 한다.

1157년 졸한 문경공 고조기의 무덤은 제주시 아라동 제궁동산에 있다. 현존하는 제주의 방묘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조기의 무덤은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나 고려시대 석물은 남아있지 않다.

고조기의 손자인 고적은 1261년 문과에 급제하고 입궐하나 노모의 병세가 위급하여 탐라로 귀향한다.

당시 방목한 우마들이 밭농사를 망치게 하고 힘센 자들이 남의 땅까지 침해하자, 판관 김구와 함께 밭 경계로 돌담을 쌓게 하여 탐라의 폐단을 시정하는 데 앞장선다.

성주의 신분으로 사신을 대동하고 1266년 몽고를 방문한 배경에는, 몽고가 탐라에까지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일본정벌을 계획하고자 함이 숨어 있었다.

이후 몽고는 일본 해로를 답사하고 탐라로 하여금 전선 100척과 군수물자를 준비토록 강요하였다. 1270년부터 3년간의 전란으로 탐라는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으며 궁성은 무너지고 성주청과 관아 등 많은 건물들과 문적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고려왕 원종과 함께 1270년 다시 방문한 몽고에서 고적이 지은 ‘관풍상국음(觀風上國吟)’이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家在三千里外程(내 고향집은 삼천리 머나먼 길 밖에 있고,) / 身留十二帝王城(이 몸은 원황제의 궁성에 머무니,) / 玉簫吹斷江南夢(옥퉁소 소리 애간장 끊는 타국의 꿈이여,) / 窓外三更月又明(깊은 밤 창밖의 달빛은 저렇게 밝구려.)

고적은 삼별초 난으로 전사한 고여림의 부친으로 138세의 천수를 누렸다 전한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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