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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224) 17세기 제주 모습, 글과 그림에 소상히 담았다

이의종, 금성교회 창립 이덕련 차남…강한 의협심으로 항일운동
 이의형, 광주법원 판사 역임…항일단체 신간회 목포지회 간사 활동
 이익우, 한림보통학교 학생 운동과 구좌읍 해녀 항일 투쟁  주도
 이익태, ‘지영록’·‘탐라십경도’·‘연무정중수기’ 남긴 제주목사

 

 

▲이의종李義宗:1893(고종30)~1920(일제강점기), 금성교회 창설자 이덕련의 차남, 평북 정주(定州)의 오산학교 학생, 본관은 전주, 제주 목사 제1호, 순교자(殉敎者) 제1호 이도종(李道宗)의 아우.

그의 선친 이덕련(李德連)은 12년 동안 금성리(목안: 모실-개) 구장(區長)을 하면서 양(梁)석봉의 집에서 부인 박열선(朴烈先)과 함께 예배를 봤다.

1911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신민회(新民會) 사건으로 본도 조천리에 유배 왔을 때에 이덕련은 남강과 교분을 가져 첫째아들 이도종(李道宗)을 평양의 숭실(崇實)전문학교로, 또 차남 이의종(李義宗)은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진학시켰다. 오산(五山)학교는 남강(南岡)이 세운 민족주의 교육장으로 알려진 명문학교였다. 일경(日警)에 체포된 이후의 소식은 끊어졌다.

그는 1908년 이기풍(李基豊) 목사에 의해 처음 세례를 받았다. 교회사 연구가 김형석(金亨錫)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금성(錦城)교회가 서문교회보다 앞섰으니 본도 최초의 교회임을 밝혔다.

1919년 3·1운동이 거족적으로 번지니 의협심이 강한 그는 일제당국에게 주목받았다.

▲이의형李義珩:1896(건양1)~?, 변호사, 신간회 지부 간사, 자는 자용(子容), 본관은 전주.

제주시 일도(一徒)리 ‘제주-성안’에서 죽오(竹塢) 이지우(李址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거쳐 경성법률전수학교(서울법대 전신)을 졸업했다.

1917년 2월 재판소 서기 겸 재판소 통역생으로 공직에 나서 1921년 5월 판사자격 시험에 합격,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및 정읍지청의 판사를 지냈다. 신간회(新幹會) 목포지회 상임간사로 활동했다.

▲이익우李益雨:1910(일제강점기)~1996, 항일운동가, 본관은 전주.

한림읍 한림리(한-수풀)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정의(旌義)군수를 역임한 이언길(李彦吉·일명 우식)의 증손이며 이한구(李漢九)의 아들로 입양, 장경렬(張璟烈)과 결혼했다.

그는 서울로 유학, 사립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법정(法政)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초 체포, 동년 2월 28일 징역 6년을 선고하자 항소해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 전국노동조합 협의회와 일본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97년 9월 그의 유해는 제주에 운구, 한림읍 귀덕리 ‘멀-왓’ 지경 어머니 묘 옆에 안장됐다.

그는 제주도 공산당 야체이카 최연소 회원으로 가입했다. 제주도 공산당 야체이카의 계보를 살펴보면 먼저 송종현(宋鍾炫·신촌·27)이 귀향해 제주청년연합의 핵심 구성원을 대상으로 몰래 공산당 입당을 권유, 다수의 청년들을 정식 당원으로 입당시켰다.

이익우는 외종형이며 4년 연상의 김정로의 권유에 의해 비밀히 입당했는데 야체이카 회원중 가장 어린 17세의 소년이었다. 1931년 5월 제3차 조공(朝共)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에 참여해 농민부를 담당했다. 이들 독서회는 지역의 청년 가운데 주로 학력이 뛰어난 계층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직해 활동했다.

동년 5월 5일 한림보통학교 재학생 400여 명이 1일간 맹휴(盟休)를 결행하면서 첫째 노예 교육의 폐지, 둘째 수업료 감면, 셋째 교과서 무상 배포, 넷째 김(金)선생을 전출시킬 것 등 4개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이 동맹휴학은 그가 뒤에서 실제 지도했다.

구우(舊右)보통학교는 한림면 명월리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일제의 강압적인 황민화 교육에 반대하고 1931년 5월 극렬 친일 교사의 실력 부족을 들어 축출 운동을 전개하면서 동맹휴학에 돌입해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이익우는 1931년 12월 중에 김태안(金泰安), 고운선(高雲善) 등을 동지로 해서 구좌 일대에서 해녀 항일 투쟁을 일으킨 배후 인물이다.

광복이 되자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선전부장으로 뽑히고 또 동년 9월 광주인민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선임됐다. 조공(朝共) 전남도당 준비위원회에 참여, 동년 12월 조선인민당 전남도당 결성준비회에서 임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고 1946년 6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재정부장으로 선출됐다.

▲이익태李益泰:1633(인조11)~1704(숙종30), 문신, 제주목사, ‘지영록’의 저자.

전주(全州)에서 이돈형(李惇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 자는 대유(大裕), 호는 야계(冶溪), ‘지영록(知瀛錄)’은 이익태가 1694~1696년에 제주목사로 지내는 동안 쓴 읍지(邑誌)이다.

‘탐라십경(耽羅十景)’에 대한 기록은 ‘탐라십경도서(耽羅十景圖序)’를 통해 알 수 있다. 서문에는 ‘탐라십경도’를 만들게 된 연유에 대해 제주의 뛰어난 10경을 병풍으로 만들어 그 사적을 기술하고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쓰고 있다. 탐라십경은 조천관(朝天館), 별방소(別防所), 성산(城山), 서귀포(西歸浦), 백록담(白鹿潭), 영곡(瀛谷), 천지연(天地淵), 산방(山房), 명월소(明月所), 취병담(翠屛潭)이며 각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소개했다.

1694년(숙종 20) 7월 이기하(李基夏)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96년 9월에 떠났다.

지영록은 재임 중에 쓴 그의 저서이다. 1997년 제주문화원에서 번역본을 출간해 17세기 제주의 실상을 아는 데 도움을 줬다. 이익태의 10세손 이완희(67)는 그 동안 소장해 왔던 유물들을 2002년 7월에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총 유품 131건 301점에는 이 목사의 영정(影幀)을 비롯해 교지, 지영록, 호구단자(戶口單子), 야계유고(冶溪遺考), 야계문집, 고서적 등 20여 점도 포함돼 있다.

이익태는 1694년에 연무정(演武亭)을 중수했다. 이 건물은 1636년(인조14) 신경호 목사가 창건한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중수하고 목사 이익태의 ‘연무정중수기(演武亭重修記)’가 지어져 현재 그 글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