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부산일보) [부산굴記-매몰된 역사⑥] 전투기 격납고에 핀 평화, 제주 '흑역사'의 재탄생

日전투기 기지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등 등록문화재로 보존
제주 최대 '셋알오름 동굴' 등
보수·정비공사하며 모니터링

광복 76주년을 맞아 <부산일보>는 부산 도심 곳곳에 방치된 '일제 동굴'을 재조명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부산에 해안 포진지, 방공호, 광산 등 동굴 수십 곳을 뚫었다. 태종대 지하벙커, 망미동 구리광산 등 지금도 새로운 동굴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굴곡진 부산 근현대사를 간직한 이 동굴들은 쓰레기 더미로 뒤덮이고, 입구가 콘크리트로 막히는 등 방치되고 있다. 강제노역 등 동굴 속 ‘아픈 이야기’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취재팀은 부산 동굴 안에 매몰된 지역의 역사를 땅 위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후대가 몸소 경험하고 깨우칠 수 있는 다크투어리즘(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계 평화의 섬’ 제주도. 천혜의 자연 경관 뒤로 일제강점기 아물지 않은 ‘아픈 역사’가 스며 있다. 섬 전체에 크고 작은 전쟁 동굴이 무려 600곳에 달하는 일본의 군사거점 기지였다. 그러나 과거 착취의 상흔은 지금, 지역 문화의 상징이자 후대를 위한 역사 교육 현장으로 재탄생했다.

 

 

 

■ 대륙 침탈·본토 방어 교두보

 

지난달 26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넓은 평야 한가운데 아치형 언덕이 솟았다. 그 아래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가 숨어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간 곳에는 좁은 동굴 입구가 나 있고, 내부에는 7~8평 남짓 공간이 있다.

 

작은 공간 옆으로는 주저 앉아야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다. 통로에는 일정 간격으로 지상과 연결된 수직 구멍이 뚫렸다.

 

취재 결과 이 지하벙커는 1926년 인근 알뜨르비행장의 지휘소, 통신소 용도로 지어졌다.

 

 

남제주비행장으로도 불렸던 알뜨르비행장은 일본군 비행기의 출격 기지였다. 일본은 이를 통해 중국 등 대륙을 침탈하고 본토를 방어했다. 1943년에는 20개에 달하는 비행기 격납로를 지하벙커 인근에 추가로 만들었다. 지하벙커 내부는 가로 20m, 세로 30m 장방형 구조다. 연합군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반지하 형태로 구축한 뒤, 위에 돌무더기를 얹었다.

 

작은 비밀 통로는 지상부의 전쟁 상황을 살피는 관측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수직 구멍 내부 벽에는 녹슨 철제 사다리가 박혀 있다.

 

 

지하벙커 옆 평야에 펼쳐진 알뜨르비행장 격납고는 현재 20개 중 19개가 원형 보존돼 있다. 입구가 ‘ㅗ’자형으로 뚫려 있는데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규모다. 인근 모슬포 바닷가의 자갈과 모래에 철근·시멘트를 섞어 만들었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격납고에 '아카톰보'라는 일명 빨간잠자리 비행기가 배치됐다. 이후 전시 때는 일본 항공대 요격기인 가와사키 ki61이 이곳에서 출격했다.

 

■ 자살특공대 출격…‘결7호 작전’ 기지

 

일본은 제주도의 넓은 평야를 비롯해 해안 인근 산과 언덕 등지에 수백 개 동굴을 뚫었다. 알뜨르비행장 옆 셋알오름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최대 규모 동굴진지가 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도움으로 들어가 본 동굴은 격자 미로형 구조였다. 중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뚫렸고, 길 중간 양쪽으로 추가 통로들이 나 있다. 통로마다 길이가 최소 50m를 넘을 정도로, 동굴은 오름 아래 전체를 두르고 있다. 내부 벽은 온통 검은색, 황토색 등이 섞인 거친 바위와 흙이다. 이날 폭염에도 기온은 25도로 서늘했고, 곳곳에 박쥐들이 날아다녀 음침한 분위가 연출됐다.

 


셋알오름 동굴진지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탄약고, 연료창고, 비행기 수리공장, 어뢰 조정고, 통신실 등으로 쓰였다. 출입구는 모두 6곳인데, 공중 폭격을 피하고자 땅 속에 구축됐다. 현재 붕괴위험으로 인해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화산암 분출로 만들어진 가벼운 돌인 '화산송이'가 뒤덮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내부에는 붕괴 사고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철제 가림막이 설치됐다. 지금도 천장에서 계속 돌이 떨어지고 있다.

 

 

인근 해안가에는 과거 일본 ‘자살특공대’(카이텐 부대)가 출격했던 ‘일제 해안 동굴진지’가 구축돼 있다. 카이텐 부대는 해안으로 침투하는 연합군 함대를 상대로 소형 선박을 들이받아 폭파시키는 역할을 했다. 바다로 툭 튀어나온 해안 절벽 아래에는 벌집처럼 작은 동굴들이 길게 뚫려 있었다. 동굴 갯수만 무려 17개로 파악됐다. 셋알오름 동굴진지와 마찬가지로 붕괴 위험으로 인해 일반인 출입은 금지돼 있다.

 

해안 동굴진지 바로 옆 송악산에는 ‘외륜 일제 동굴진지’도 뚫려 있다. 산책길을 따라 나 있는 동굴 입구는 바짝 엎드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총 동굴 길이는 1.4km로 제주도 동굴 중 두 번째로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입구 수만 무려 41개에 달한다. 동굴 안 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내부 구조가 마치 지네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들 동굴진지를 포함한 주변 군사시설은 모두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지어졌다. 수세에 몰린 일본이 ‘결7호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본토를 방어하고자 제주도를 군사요새화했다. 이 시기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사단·여단 등 모두 7만 5000여 명의 병력이 연합군에 맞서 제주도 곳곳에 주둔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 80년 전 참혹함 그대로

 

제주도에는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뿐 아니라 제주시 서우봉, 어스생악 등 곳곳에 일제강점기 동굴이 뚫려 있다. 제주도는 이 동굴들을 새롭게 단장하기보다, 조명 설치 등 최소한의 정비로 원형을 보존했다. 있는 그대로의 동굴을 보며 강제노역, 전쟁의 잔인함과 참혹함을 느끼도록 역사 자원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흔적을 ‘흑역사’로 취급해 쉬쉬하지 않았다. 2010~2015년 지역 내 일제 군사시설을 전수 조사하고, 각 시설 특성에 맞는 활용계획을 세우는 등 기록화 작업에 나섰다.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등 일부 유적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성과를 냈다. 사유지 내 일부 시설은 보존을 위해 부지 매입을 추진했다.

 

그 결과 현재 송악산 일대 등에는 다크투어리즘(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이 생겼다.(지금은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다.) 유적마다 관련 안내판이 설치돼 있고, 어린아이가 쉽게 이해하도록 '만화 이야기판’도 만들어졌다.

 

알뜨르비행장 한 격납고에는 과거 일본 비행기를 형상화한 모형도 설치됐다. 비록 뼈대만 있는 녹슨 철제 구조물이지만, 당시 격납고의 역할과 전쟁의 참상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비행기 날개에는 태극기 문양이 그려졌고, 방문객들이 쓴 형형색색의 쪽지도 걸려 있다. ‘이제 와서 우리가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고 알리며 대비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영원하길’ 등의 글귀가 적혔다.

 

현재 부산 등 다른 지역의 일제강점기 동굴은 실태 파악이 이뤄지지 않아, 존재도 모른 채 개발 공사로 사라지기 일쑤다. 동굴과 관련된 주민 증언도 기록화하지 않아 사라지거나 바뀌는 경우가 잦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제주도는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이 많다 보니 붕괴 전에 기록을 남겨야 했고, 전수 조사를 기반으로 보수·정비 공사도 가능했다”면서 “현재 돌봄 사업, 지킴이 활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동굴진지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