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6주년을 맞아 <부산일보>는 부산 도심 곳곳에 방치된 '일제 동굴'을 재조명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부산에 해안 포진지, 방공호, 광산 등 동굴 수십 곳을 뚫었다. 태종대 지하벙커, 망미동 구리광산 등 지금도 새로운 동굴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굴곡진 부산 근현대사를 간직한 이 동굴들은 쓰레기 더미로 뒤덮이고, 입구가 콘크리트로 막히는 등 방치되고 있다. 강제노역 등 동굴 속 ‘아픈 이야기’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취재팀은 부산 동굴 안에 매몰된 지역의 역사를 땅 위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후대가 몸소 경험하고 깨우칠 수 있는 다크투어리즘(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40년 전쟁기지’였던 부산 가덕도. 이곳엔 정체불명의 크고 작은 해안 동굴이 최근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가덕도 외양포 마을은 겉으로 보이는 ‘역사의 상흔’뿐만 아니라, 강제로 쫓겨난 주민들의 한 서린 사연도 품고 있다. 안타깝게도 증언할 주민은 점점 사라지고, 신공항 건설로 마을도 존폐 위기에 놓였다.
■ 해안 절벽에 동굴 ‘숭숭’
부산 강서구 가덕도 새바지항. 항구 뒤편 인적이 드문 ‘시크릿 자갈 해안’을 지나면, 해안 끝 먼발치에 동굴이 보인다. 아찔한 바위 절벽 중턱에 자리 잡은 대형 동굴. 언뜻 봐도 경사가 가파른 데다 입구가 수풀로 뒤덮여 사람이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취재진이 이틀 간의 도전 끝에 진입한 동굴에는 가로, 세로 각각 3m 정도의 입구가 뚫려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양쪽으로 두 갈래 길이 나 있고, 오른쪽 길은 성인 가슴 높이의 작은 굴로 이어졌다.
취재 결과 이 절벽 동굴은 1940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구축한 포진지로 추정된다. 좁은 내부에 비해 넓은 입구는 군사작전에 적합한 구조로 여겨진다. 밖에서는 어두운 내부를 볼 수 없으나 안에서는 외부를 훤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바지 마을 주민 A(80) 씨는 “옛날에 이 근처에 일본 사람이 집을 짓고 많이 살았는데, 전쟁한다고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동굴을 팠다”면서 “하늘에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분위기가 살벌했는데,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해 동굴이 실제 전쟁에 쓰인 적은 없다”고 전했다.

가덕도 대항·천성·새바지 등지에는 이와 유사한 용도의 굴이 수십 개 뚫려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일본군이 해안 곳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가덕도뿐 아니라 대한해협을 낀 부산 남해안 일대에도 군사 유적지가 즐비하다.
새바지항 동굴의 경우 현재 붕괴 위험으로 입구가 막혀있지만, 해안 언덕 아래엔 지자체가 정비 작업을 한 기관총 동굴진지도 있다. 해안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벙커다. 일본군의 관리·감독 아래 강제징용된 강원도 탄광근로자들이 뚫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본군 본진 ‘외양포 포진지’
가덕도 남쪽 한적한 포구였던 외양포. 이곳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원치 않게 마을 전체가 일본군 포진지로 전락해버렸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진해에 대규모 함대를 뒀고, 이를 지키기 위해 외양포와 저도 등 주변 섬에 포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1904년 8월 일본군 공병이 포진지와 부대막사 등을 지었고, 이듬해 5월에는 편성 부대가 상륙했다.

실제 외양포 마을 곳곳에는 일본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적산가옥은 벌겋게 녹슨 철제 슬레이트벽이 둘러졌고, 짧은 처마 같은 '눈썹지붕'이 달려 있다. 마을 위편 포진지에는 탄약고, 포좌 등 군사시설이 집결해 있다. 입구에는 주둔군이 썼을 법한 화장실 터가 남아 있고, 포진지 안쪽에는 지름이 족히 3m 되는 포좌 6문이 있다. 일본군은 280mm 유탄포를 이곳에 배치했다.

포좌들 사이 아치형 언덕 아래에는 탄약고가 3개 뚫려 있다. 가로 3m, 세로 5m 규모의 탄약고는 폭발 등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진입로를 이리저리 엇갈리게 뚫었다. 탄약고 건너편에는 소대 내무반 정도 크기의 엄폐 막사 2곳이 있고, 막사 위에는 공중의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위장 수목이 심겼다.
이밖에 외양포 마을에는 목욕탕, 우물, 내무반, 사령관실, 무기고, 헌병부 등의 건축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주변 산에는 러일전쟁 이후 1940년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구축한 대공포진지와 관측소도 있다.
■ 섬 전체가 요새화…기록으로 남겨야
가덕도 전체가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원주민들은 섬에서 쫓겨났다. 당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토지를 강탈하고 주민을 쫓아내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주민 이성태(67) 씨는 "어른들에게 듣기로, 일본군이 강제로 불을 지르면서 주민들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지금의 주민들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일본 패망 이후라고 한다. 쫓겨난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남아 있는 부대시설을 '제비뽑기'로 정해 거주하게 됐다. 뽑기를 잘한 사람은 시설이 좋은 사령관실에 입주하는 식이다.
길게 뻗은 병사 막사에는 4가구가 나눠 살았다. 그래서 한 건물이지만 지붕 색깔이 제각각이다. 어떤 세대는 테라스와 꽃밭을 조성하는 등 리모델링 공사를 해 놓았다. 막사 가장 끝집에 사는 주민 B(70) 씨는 "이 집은 할아버지 때 제비뽑기로 분양을 받았다"면서 "이후 집 기둥이 삭는 등 노후화가 진행됐는데, 시멘트를 보강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유·무형의 아픈 역사가 있는 가덕도 마을은 신공항 건립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홀로그램 영상, 표지판 등 나름 관광자원화가 잘 돼 있는 가덕도 외양포도 역사 속에 묻힐 수 있다.
부산 강서구청 관계자는 "공항의 정확한 도면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부지에 걸쳐 있는 땅굴이 꽤 있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록 침략과 탄압의 역사이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가치 있는 역사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유적에 대해 당장 가치 판단을 하기 어렵다면, 다음 세대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대 사학과 전성현 교수는 “사실 신공항 추진 때부터 이를 문화유산으로 남길 방안을 찾았어야 했다”면서 “지금부터라도 공항 안에 가덕도 역사전시장을 만들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동굴의 원형을 남기는 등 보전 논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