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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189)일제 수탈에 분연히 일어난 해녀 항쟁 주도

신상묵, 제주도 경찰국장 등 역임…4·3으로 봉쇄된 한라산 개방
신상준, 前 영남대학 총장…미군정기의 남한행정체제 등 저술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독도 지킴이’ 역사·사회학자
신재홍, 항일운동가…혁우동쟁 조직해 제주해녀항일투쟁 주도 
신찬익, 제주농업학교 재학중 학생운동 주도하며 일제에 항거

 

▲신상묵辛相黙:1915(일제강점기)~?, 제주도 경찰국장, 서남지구(지리산)전투경찰사령관.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으로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를 중퇴하고 해방 후 전남 진도·나주·장성 및 경북 영일 등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했다. 그는 무장대의 활동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동년 9월 21일 한라산 개방을 선언, 도민들이 자유롭게 한라산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1955년 9월 21일 ‘한라산개방, 평화기념비’를 정상에 세웠다. 1954년 8월 제주도경찰국장으로 부임해 4·3 사건의 뒷 처리에 나서더니 1년 10개월 재임하고 떠났다.

1950년 경북도경 보안과장을 거쳐 6·25 전쟁 직후 지리산에 은거한 빨치산을 섬멸하기 위해 설치된 서남(西南)지구 전투경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돼 전과를 올렸다.

1953년 전북경찰국장을, 전임자 이경진(李慶進) 경찰국장은 38선 부근 접적(接敵)지역의 경찰행정직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견적필살(見敵必殺)의 무인 정신을 발휘했다.

제주에 들어와서도 마을마다 구축한 석성 안에 무장대가 출현하면 필살의 공격으로 대적하고 이를 놓치면 해당 지역 담당경찰관을 해임했다. 그런데 신상묵 국장은 전임지에서 전투사령관으로 있을 때 선무공작으로 많은 성과를 올린 문화적 경찰행정을 폈었다. 이런 경험으로 마을의 석성을 지키던 당번제를 없애고 무장대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면서 그 소재지를 파악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신상준申相俊:1931(일제강점기)~2009, 대학 교수, 영남대학 총장.

한림읍 귀덕리(멀-왓) 신계생(申癸生)의 차남으로 태어나 제주농업중하교(6년제)에서 수석을 다퉜다. 1960년 단국대학 사학과 졸.

한국전쟁 시 보통고시 준비를 하던 중에 육군 장교로서 참전해 중위로 제대했다.

제주농업중학교를 졸업해 단국대학 사학과 졸업, 국방부 행정사무관(1962~1971), 경희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다(1972). 저서 ‘미군정기의 남한행정체제’, ‘복지행정론고’, ‘제주도4․3사건 상권·하권’.

경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청주여자사범대 조교수, 대구대학교 교수, 동 대학 법대학장을 거쳐 대학원정, 대구·경북행정학회 회장과 한국복지학회장을 지냈다. 말년에는 제주도로 내려와 저술에 몰두하며 학술원 회원에 진출하고자 원고작성에 노력했다.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 시절까지 나와 동기생으로서 같은 농과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해 학교는 장기 휴학에 들어가 이웃마을 한림읍 귀덕리를 찾아갔다.

보통고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뒤 군에 입대해 미국에서 장교교육을 받고 후일 학계에 몸을 담았다고 들었다.

영남대학 총장에서 물러난 뒤에 낙향해 신제주의 숙소에서 집필 길로 몰두, 이 무렵부터 3년여 나와의 빈번한 만남이었다.

다른 동창이 전화하더라도 그저 받지도 않고 저술에 몰두하더니 2009년 타계했다.


▲신용하愼鏞河:1937~생존. 제주시 화북동 출신.

서울대학교 교수.

 
▲신재홍申才弘:1900(광무4)~1946(미군정기), 조선공산당 및 제주도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광복 후에 행방 묘연,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본관 평산, 신진호(申辰好)의 아들로 구좌읍 연평리(牛島)에서 태어났다. 1925년 5월 12일 우도 우두원(禹斗元) 댁에서 이경필(李敬弼)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우도에 첫 기독교 교인이 탄생된 것이다. 그는 1927년 8월 광주에 사는 조선 공산당원이며 고려 공산청년동맹 전남도책 김재명(金在明)의 권유로 입당해 급진적인 항일 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때 검거를 면했다. 후일 혁우동맹을 통해 제주해녀를 교양하고자 했다.

제주 청년동맹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비밀 조직에 나섰다.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정된 ‘혁우동맹’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조천공산당에 가입했던 신재홍이 주도했다. 동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1월 7일(러시아 혁명일) 산지의 축항 공사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1931년 1월 12일 일어난 구좌면 해녀 투쟁은 제주도 야체이카의 항일 노선과 일치했다. 전자는 강창보의 지시로 김두경이 하순철에게 전달하면서 일으킨 운동이라면 후자는 신재홍이 지도로 오문규(吳文奎), 문도배(文道培 )등에게 전달된 항일 투쟁이다.

청년 운동가들은 야학을 통하여 문맹(文盲)인 부녀자들에게 교육을 담당했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해녀 항쟁으로 일제는 1932년 3월 전도의 청년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 강창보 이하 100여 명을 체포했다.

▲신찬익申璨翊:1912(일제강점기)~1969,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본관은 평산, 신제근(申濟根)의 아들, 한림읍 대림리(선-돌)에서 태어나 1931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일제하에 저항 운동이 거세게 폭발해 1930년 운동이 파급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931년 3월 졸업 사정회에서 졸업 예정자 김원요(金源堯·21·조천)를 제적 처리하고 신창진(愼昌珍·18·월정)과 양두옥(梁斗玉·18·신창)에게 유급조치를 내렸다.

이들은 3학년이 된 후 평소 소위 일본 천황의 칙어(勅語)를 학교 의식 때에 봉송(奉誦)을 해도 전혀 묵도하지 않아 교사들로부터 주목받던 터였다.

동년 3월 7일 졸업식 날에 김원요는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인 일본 사람 야마가와(山川助夫)에게 부당한 조치에 강력히 저항했다.

담임은 경찰에게 알리니 이를 체포해 제주경찰서에 수감해 버렸다.

이를 알게 된 유급당한 동창 신창진과 양두옥은 동월 9일 교장실로 찾아가 교장 스기사키(杉崎勝藏)에게 부당함을 항변하고 일본인 교사 모리다(森田親厚)에게 일격을 가했다.

제주일보